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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여름 한정판! - W.프록시마
여름 한정판! - W.프록시마






욕조를 향해 머리를 한껏 수그리고 매생이 마냥 긴 머리칼을 마구 문대며 머리를 감다가 샴푸에 붙은 홍보용 문구를 발견했다. `여름 한정판! 레몬 향이 듬뿍!` 문구를 읽느라 샴푸 물이 눈에 들어오는 낌새도 자각하지 못했다. 노인네 마냥 인중을 길게 늘리고 빠르게 눈 구멍을 닫았다 여는 것을 반복했다. 빠르게 깜빡인다고 한 건데 눈물만 줄줄 흐를 뿐 따가운 끼는 빠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러다 보니 홍보용 문구는 잊혀졌다. 그리고 내 여름의 한정판 시리즈를 적어내려 수첩을 펼치고 자그마한 연필을 드니 그제서야 그 문구가 떠오른 것이다. 생각해보면 머리를 감던 그날도 여름 한정판이었다. 진지하게, 그러니까 마치 여성들에게 인기 없는 타입의 남성들처럼(실제로 이야기를 들은 우리 학교 남학생은 여름은 필히 유한한 계절이라며 나를 비판했다) 파고들자면 여름은 그 존재 자체로 한정판이다. 매해의 여름, 그러니까 2018년의 여름과 2019년의 여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한정판이 맞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위처럼 재미없고 떫은 타입의 인간형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만화방에 제일로 구석진 칸에, 가장 높은 칸부터 머리를 바닥에 바짝 수그리는 맨바닥인 곳까지 차지하는 `소오름, 한여름의 오싹한 공포!`로 홍보하는 삼류 소설쯤에 나올법한 일을 겪고 느낀 여름만 한정판의 수식을 달아주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나의 20XX년 여름은 재판 따윈 없는 한정판 오브 한정판이다.



사족이 길었을 수도 있겠다. 이 글은 내가 겪은 일을 세세하게 직접 기록한 수기이다. 괜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걸 껄끄러워 하는 편이지만, 불가사의를 경험했다. 불가사의를 경험하고 쓴다.











여름 한정판

박지민 X 김태형 X 전정국













여주는 동아리실의 사물함 앞에 서있다. 사물함 안쪽의 곱게 접힌 쪽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동아리실 창문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교복 셔츠에 스며들었다. 가벼운 쪽지를 쥐었다 놓았고,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여전히 손안에서 움찔거렸다. 동아리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무릎을 수그려 앉았다. 두 무르팍을 가지런히 모은 뒤 쪽지를 펼쳤다.









누나는 너무 잔인해요.



누나는 늘 나를 울려요.









응?









*

누굴까.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책상의 튀어나온 부분을 아무리 매만져도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다듬어진 손톱을 매만지던 여주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동아리 후배 셋뿐이었다. 설마. 학교에서 물어보자 다짐하곤 눈을 감았다.













*

- 어, 누나!





교실에 들어가니 짝꿍 대신 정국이 앉아있다. 명랑한 웃음으로 여주를 반긴 정국은 자연스레 어깨에 손을 올린다. 동아리 일정 조율로 어젠 안 모였는데. 뭐지? 속으로 생각하던 게 입 밖으로 나왔다. 엥, 그건 왜요?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며 천진한 물음이 뒤따른다. 아···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애들 다 모이면. 개인적으로 묻기엔 민망한 주제였다. 내일은 동아리가 모이는 날이었다.











**





저녁노을이 동아리실을 비춘다. 여름낮이 끝나가는 시간이라 공기가 선선했다. 문을 연다. 쪽지가 떳떳하게 누워있다. 가슴에 손을 올린다. 바싹 마른 교복이 손바닥만큼 눌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쪽지의 꼬인 다리를 풀어 글자를 눈에 담는다.







누나의 밤이 궁금해요



끝없이 파고들고 싶어요







정갈한 글자들의 나열이 익숙한 듯 어색했다. 누구지? 대체 누굴까. 왜 이렇게······ 악!









- 누나, 거기서 뭐해요?





태형이 동아리실의 소파에 멍하니 앉아 물었다. 아마 처음부터 있었나 보다. 태형은 종종 동아리실에서 잠을 잤다. 동아리실이 가장 시원해서 그렇다고 했다.





어색하게 뒷걸음질 치며 덧붙였다. 깜짝이야. 그냥··· 혹시, 이거 네가 쓴 거야? 쪽지를 태형에게 보여줬다. 두 눈이 따가워질 때까지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 ··· 아뇨? 이걸 제가 왜.





태형의 입 부근이 묘하게 굳는다. 접힐 듯 말 듯 고민하는 눈꼬리와 굳다 만 입이 이질적이다. 생각하듯 멈춰있던 태형이 다시금 눈을 접어 웃는다.





- 근데 이거 누가 보낸 건지 알아요? 누가 이렇게 비밀스럽게?

- 아니. 나도 그걸 모르겠어. 너희는··· 아니겠지?

- 글쎄요. 난 아닌데. 누굴까.





태형이 소파에 널브러진 담요를 챙기고 동아리실의 문을 반쯤 열었다. 그리곤 여주를 향해 몸을 돌린다.





- 가요. 내일 모여서 얘기해요.









***

- 이게 사물함에 있었다고요?

- 어제 누나 표정 진짜 안 좋았어, 이것 땜에.

- 와··· 누가 보냈을까?





한 마디씩 거들던 셋의 눈동자가 여주를 향했다. 처음은 정국, 두 번째는 태형, 마지막은 지민 순이다. 하교 후 축구를 하던 그들을 모은 건 태형이었다. 동아리실에 모인 셋은 녹진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여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 근데, 오늘은 안 왔어요?





지민이 사뭇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어버버 말을 고르던 여주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내리깐 지민이 다시금 말했다.







- 같이 확인하러 갈까?





그러는 게 좋겠어. 여주가 다짐하듯 작게 읊조렸다.









****







사물함을 연 넷의 눈동자가 한곳을 향한다. 누군가는 원망의 눈빛을, 누군가는 분노의 눈빛을, 누군가는 의문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여주가 조심스레 쪽지에 손을 뻗었다. 똑같은 모양새로 접힌 쪽지를 찬찬히 펼친다.





신경 쓰지 말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의 밤은 길어요.









- ... 미친 새끼 아냐?





... 그러게. 여주가 힘없이 대답했다. 쪽지는 정국의 손에서 구겨졌다. 태형이 지민을 무딘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짝다리를 짚은 태형이 발을 규칙적으로 굴렀다. 탁. 탁. 소리에 맞춰 바람에 창문이 흔들렸다. 동아리실의 공기가 무거웠다.











*****





집을 나서는 여주의 앞에 지민이 섰다.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여주의 표정에 지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 일찍 나와서. 누나가 이때쯤 나오는 것 같아서 와봤는데, 타이밍 죽이네요. 지민이 여주를 바라보며 뒤로 걸었다. 뒤로도 잘 걷네. 생각 없이 받아친 여주의 말에 지민이 눈을 접어 웃는다. 한참을 웃던 지민의 표정이 지민의 시야, 그러니까 여주의 뒤 편을 보고 굳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여주가 뒤를 돌아보려 하자 지민의 몸이 여주를 급히 감싼다. 어정쩡하게 멈춰 서있던 여주가 지민의 어깨를 세게 밀쳐낸다.





- 박지민. 너 이제 그만해.

- ... 뭘?

-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





하교 시간. 여주는 그들을 찾으러 갈지 말지 고민한다. 친구가 없기도 했고 외로움을 잘 타기도 했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고민일지도 몰랐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늘 그랬다. 여주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문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여주는 어쩌면 그게 영화의 마지막 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지민이 소리 질렀다. 정국을 찾는 소리는 1학년 층을 메아리치듯 울렸다. 주먹을 꽉 쥔 지민은 끊임없이 다리가 풀렸다. 허벅지를 쥔 지민의 손목 혈관이 숨을 고르는 박자에 맞추어 튀어나왔다. 지민은 눈을 크게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지민의 눈썹이 규칙적이게 위아래로 움찔댔다. 주저앉은 지민의 시선에 실내화를 신은 누군가가 담겼다. 복도 창문으로 지민과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쭉하게 비쳤다.







태형이 거친 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는 복도를 달렸다. 복도의 끝엔 여주의 반이 있었다. 여주가 문을 열었을 때 태형은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허벅지의 어딘가가 분명 아프다고 생각했다.









*****+++





여주가 문을 열었을 때, 태형이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여주가 소리쳤다.





- 태형아!





태형이 급격히 속도를 늦췄다. 강하게 힘주어 달리던 허벅지의 힘이 풀리며 태형의 다리가 꼬였다. 속도를 늦추려던 태형이 복도 한가운데에 넘어졌다. 이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던 여주가 태형에게로 달렸다.







달리던 여주의 눈에 정국이 담겼다. 여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태형은 고통을 참기 위해 이빨로 입술을 짓이겼다. 정국이 태형에게로 빠르게 걸어갔다. 점점 빠르게 태형에게로 간 정국이 태형의 멱살을 잡고 강하게 일으켰다. 복도의 어딘가에 선 여주가 눈을 감았다.







정국이 창가 쪽 벽으로 태형을 밀쳤다. 다리의 힘이 풀린 태형이 천천히 주저앉았다. 정국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도 같았다. 태형이 실소했다. 머리를 쓸어 올린 태형이 입술에 고인 피를 대충 닦아냈다. 습관처럼 눈가 근처를 긁던 태형이 입을 뗐다.







- 그만해라, 정국아. 지겹지도 않냐?

- 그럼 네가 먼저 적당히 했어야지.

- 그러니까. 근데 알잖아. 박지민이 먼저,







습관처럼 태형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웃음처럼 말하던 태형이 말을 멈췄다. 지민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복도 끝의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의 꼴이 엉망이었다. 지민이 허탈한 듯 복도에 주저앉았다. 지민의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그건 태형과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여주는 생각했다.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여주는 마지막 쪽지가 으스러질 듯 세게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 네 개가 남았다. 여주는 다시금 쪽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요즘엔 낮보다 밤이 길었다. 끝없는 밤이었다.















******









어째 낮이 없어요



이건 다 누나의 탓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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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순끼  252일 전  
 순끼님께서 작가님에게 11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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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연깅  257일 전  
 지려요

 낙연깅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강하루  257일 전  
 글 잘쓰시네요

 강하루님께 댓글 로또 15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루미☽  258일 전  
 ☾루미☽님께서 작가님에게 36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루미☽  258일 전  
 오오 재밌어요

 ☾루미☽님께 댓글 로또 3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wendy0613  259일 전  
 재밌어요! 잘읽고갑니다ㅎㅎ

 wendy0613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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