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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죽은 사랑 - W.아프로던트
죽은 사랑 - W.아프로던트



과거를 곱씹는다. 종국에는 과거를 내버려두고 도망쳤다. 과거는 석진을 옥죄는 일종의 족쇄였다. 그래서 부러 더 큰 뜀박질을 했다. 고집 세고 과묵한 석진에게도 사랑하는 여자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얘기였지만 그 과거는 드문드문 떠올라 매일 석진을 죽였다. 그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학교 운동장이었다. 낡아빠진 초등학교는 곧 폐교가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적 드문 운동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네가 하나 있었다. 덜렁 놓여진 그네는 녹이 슬어 볼품이 없었지만, 성격 좋고 유쾌한 여자는 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앉을 자리가 있다며 좋아했다. 적어도 석진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그네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매마른 물을 주워담을 수 없듯이 죽어버린 사랑은 돌이킬 수 없었다.

사랑한다 속삭이는 여자는 다정했고 한없이 유했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솜사탕과도 같다. 한 입 먹으면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혹은 녹아버릴 것 같은. 여자의 속삭임은 단숨에 석진의 벽을 허물었다. 눈 깜짝할 새에 성큼 다가왔고 눈을 떴을 땐 여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석진은 덜컥 겁이 났다. 사랑에 한없이 서툰 남자는 바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감정과 생소한 감촉. 석진은 항상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난 뒤 가쁜 숨을 몰아내쉬었다. 그것은 일종의 부작용과 비슷했다. 사랑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과호흡. 심장이 터질 듯이 위아래로 달그닥거렸다. 마치 자기 자신이 고장난 것 같다고.

석진은 언제나 가벼운 연애를 추구했고 상대방의 진심에 한없이 취약했다. 감정은 낭비다. 이것은 석진의 연애 신념이기도 했다. 감정에 얽매이는 순간 어른은 유치해진다. 그래서 석진은 선을 중요시 여겼다. 석진에게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란 게 존재했다. 이 선을 침범할 시 그는 언제나 장대한 벽을 세웠고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게 겹겹이 자물쇠를 걸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제부터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석진의 심장부터 스며들었다. 물감 번지듯 주변을 물들이더니 그의 발끝부터 뇌까지 점점 침범하기 시작했다. 제 영역을 잠식하는 여자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적어도 자신에게 만큼은 불가항력이었다고. 석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곧 폐교가 된다던 학교는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국이 늘비했다. 아주 오래 전에 지어졌다던 학교 뒷편은 철거 공사가 시작된 모양인지 이미 먼지와 건물 잔해로 가득했다. 여자는 운동장에 나뒹구는 혹은 설치됐다고 말하기에도 뭐한 녹슨 그네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항상 내뱉던 다정한 목소리와 감미로운 얼굴로 석진에게 말을 걸었다. 석진은 지난 날 여자가 줄곧 해왔던 말들을 떠올렸다. 사랑해 혹은 사랑해. 앞으로도 사랑할테야.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가 사랑을 속삭일 것이라고 석진은 믿어의심치 않았다.


-나 사실 곧 죽어


그러나 석진은 일순간 피가 역류하는 기분을 느꼈다. 여자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무덤덤했다. 때문에 석진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무던한 노력이 필요했다. 여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야기했다. 웃고 있는 낯짝이었지만 여자는 울고 있었다. 덤덤한 어투였을지는 몰라도 지금 되씹어보면 표정이 지나치게 흔들렸던 것도 같다고. 석진은 한참이나 입술을 벙긋거렸다. 위로의 말은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 석진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자는 말을 끝으로 녹슨 그네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이 다섯발자국 떼어졌을 무렵 석진은 비로소 그네에서 일어나 잠잠코 여자 뒤를 좇았다. 여전히 귓가에는 여자가 습관처럼 뱉던 말이 울렸다.


사랑해


그 해 여름, 여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랑은 죽었다.




°
°
°


나 사실 곧 죽어 = 헤어지자

석진은 이별을 죽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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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라햇님  46일 전  
 라햇님님께서 작가님에게 123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라햇님  46일 전  
 던튜 님,,, 그저 살앙,,, 체고••••❤️❤️

 라햇님님께 댓글 로또 15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유선비  48일 전  
 와 이 글을 이제 봤다... 미친 작가님!!

 유선비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아잏정말  50일 전  
 와이건미친듯

 아잏정말님께 댓글 로또 8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은일여화  50일 전  
 은일여화님께서 작가님에게 200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니닷!  50일 전  
 글 좋아요

 니닷!님께 댓글 로또 1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강하루  50일 전  
 글 잘쓰시네요

 답글 0
  잉쪼  51일 전  
 잉쪼님께서 작가님에게 187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서진°°  51일 전  
 헐 ...ㅠㅠㅠㅠ

 답글 0
  김.잔디  51일 전  
 ㅠㅠㅠ글 너무 좋아요ㅠㅠㅠ

 김.잔디님께 댓글 로또 11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16 개 댓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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