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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천 년 겨울 만 년 여름 - W.해늘°
천 년 겨울 만 년 여름 - W.해늘°


『Trigger warning | 죽음에 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는 글임을 사전에 밝힙니다.』







정아, 너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죽지 말아.



***



⠀⠀입에 쓴 물이 나도록, 좋던 싫던 그는 나를 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가령 사랑이 이유가 된 허기라던가 내가 집어삼키게 만든 온도 같은 것들로써 말이다. 그러한 것들은 떨치려 할수록 내 몸속에서 부피를 키워 폐를 짓눌렀다. 그러다 숨이 막힐 즈음에야 움츠러들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게는 그게 사랑이었다.

⠀⠀마음의 가난은 가장 멍청한 죄다. 나는 가장 멍청한 죄를 지은 가장 멍청한 죄수였다. 그런 멍청한 것들은 감정에 헤프다. 죽일 듯 맹목적인 사랑을 나는, 가난한 나에게 쏟아붓는 구원으로 여겼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시점에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죽는 것만큼 사랑스러운 것도 없을 테니까. 가난한 나는 조금의 반짝임에도 세상 전부인 것처럼 구질하게 매달렸고, 그런 나를 사랑하는 그에게서는 겨울바람 냄새가 났고, 그는 내게 여름밤 냄새가 난다고 했고, 그가 죽어버린 밤에는 가을 단풍잎 냄새가 났다.

⠀⠀너는 나보다 일찍 죽지 마. 그는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만약 내가 그보다 먼저 죽어버렸다면, 그는 나를 서걱서걱 조각내어 삼켜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사랑은 달에게 밤의 존재와 같은 것이라, 그는 나를 잃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를 죽게 만들었던 것은, 또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는 과한 사랑만큼 가난한 나에게 처음 느껴보는 반짝거림을 선물했다. 아, 이렇게 바라보다가는 내가 눈이 멀어 죽겠구나. 벅차 숨이 멎겠구나. 모든 게 거짓말, 사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그의 어딘가에 묻히길 바라는 것 같았다. 정작 내 목숨에 가장 구질한 건 그였지만 말이다. 그는 나를 자신이 발 딛고 살고 있는 지구처럼 여기다가도 이따금씩은 드넓은 우주 속 행성으로 여겼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일부였다가도 그 일부가 없으면 되지 않아 전체가 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나를 가둬놓고 사랑 가루약을 탄 쓰지만 나를 살리는 물을 끊임없이 부었다. 나는 웃으며 뿌리부터 썩어갔다. 그런데 그가 죽어버렸다.

⠀⠀그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죽었다. 내가 달려갔을 때 그의 몸은 이미 딱딱했고 차가웠고 아팠다. 소름 끼치게 고요한 새벽 도로는 스산했다. 노란색 신호등만 깜빡이고 있었다. 널브러진 그를 다급히 안아 올리자 나의 손가락 모양대로 그의 몸에 자욱이 남았다. 서러웠다. 서러워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상처 난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미친 것인지 간절해 그런 것인지 제대로 된 사고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면 살아날지도 몰라. 내 피를 긁어모아 그의 입 속으로 흘려보냈다. 내가 우느라 들썩여 그런 것을 그의 몸이 움직이길래 반색했다 다시 무너졌다. 그제야 넓게 흩어진 그의 피가 보였다. 아··· 이 사람은 B형이고 나는 A형인데······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고 이유조차 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생각했다. 간절함이 과하면 슬퍼진다. 나를 생각하며 죽었을까. 나를 찾았을까.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을까. 그게 나는 아니겠구나······ 눈물이 흐르는 건지 물속에 잠긴 건지 모를 만큼 울었다. 아닌가, 가을비가 내리긴 했다. 빗방울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떨어졌다. 혹시 너야······? 그 나뭇잎을 붙잡고 물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그의 몸에 자욱이 남는 게 싫어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텅 빈 도로에 나만 메아리쳤다. 나만. 아프다고 말이라도 해봐. 이렇게 죽은 사람처럼 있지 말고 손이라도 까딱여봐······ 한참을 울고 나니 아프게 죽은 그의 몸이 아프지 말라는 듯 내게 말했다. 분명 그랬다. 정아, 너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죽지 말아.

⠀⠀죄수들이 죄를 지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가난이라는 죄명을 가진 나는 가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까? 들인 것 없는 텅 빈 마음이 나의 오아시스였을까? 아니지, 아니다. 나는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사랑, 사람, 마음, 몸, 온기.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가진 그는 부자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라고 태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욕망대로 사랑했다. 감히 죄를 지었다. 나의 운명에 없던 그를 억지로 끼워맞췄다. 그는 나의 일부가 되어 함께 있음에도 없음에도 어디쯤에 숨 쉬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죽어 숨을 멈췄다. 어떡하지. 어떡해.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핑 돌았다. 나도 그를 따라 죽는 게 빠를까. 그게 벌일까. 아니지, 나의 벌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죽지 않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 그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게 벌이고 구원이다. 내가 죽으면 누가 그를 기억해줄까. 나와 그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싫다. 그와 내가 나눴던 사랑이 허상인 듯 우리의 물건들은 검은 봉투에 담겨 태워지고, 이름 모를 누군가와 함께 재가 되어 묻히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너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어떻게든 살아가는 나를 계속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내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만날 수 있는 걸까? 아니지······ 그건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이 몸으로 숨 쉬는 동안은 왠지 네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그의 죽은 몸을 최소한의 맞닿음으로 끌어안고 작은 우리 집까지 걸어갔다. 집이랄 것도 없는 방 한 칸이었지만 다시 그와 함께 돌아왔다. 우리집. 앞으로도 그럴 집.

⠀⠀죽지 않는다는 것은 살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무겁다는 것이다. 그가 사 오던 2,500원짜리 맥주 두 캔과 집어먹던 맛없는 땅콩 안주. 내가 가위를 놓치는 바람에 삐뚤어졌던 그의 앞머리. 그가 사다준 노란색 편의점 우산. 우리 집, 작은 단칸방의 구석에 쌓아두었던 낡았지만 유일했던 이불들. 나는 그게 너무 무겁다. 정이 가득해서. 이제 정만 가득해서. 죽은 그의 몸에서는 아직도 겨울바람 냄새가 난다. 온 방이 겨울이다. 시리고 포근한 그 냄새는 사시사철 사라지지 않아······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계속될 겨울에 나는 그를 상기해야만 한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계속될 여름에 그는 여름밤 냄새를······ 만 년이 지나면 지구도 사라질까? 나는 그의 지구인데, 나도 지구도 죽어 모든 것이 비로소 끝나면, 다시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기다려 우주를 떠돌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죽기 위해 살아. 나는 살아서, 어떻게든 살아서, 죽지 못해 살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내서, 끝내 모든 겨울을 다 보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정아.
⠀⠀응.
⠀⠀오랜만에 본다.
⠀⠀옆에 있었으면서.
⠀⠀알고 있었네.
⠀⠀우리 집에서 계속 겨울바람 냄새가 나고 있거든.
⠀⠀이리 와. 안아줄게.
⠀⠀······
⠀⠀무슨 냄새 나?
⠀⠀······ 여름밤 냄새.
⠀⠀정아.
⠀⠀······
⠀⠀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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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새송°  49일 전  
 해늘 님 보고 싶었어요! 글 너무 좋아요ㅠㅠ

 새송°님께 댓글 로또 18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북부대공유중혁  54일 전  
 해늘 님 글은 늘 몽글몽글 따뜻한 것 같아요
 잘 보구 갑니다 :)

 북부대공유중혁님께 댓글 로또 16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블유˚  54일 전  
 블유˚님께서 작가님에게 1004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유선비  54일 전  
 글 좋아요.

 유선비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니닷!  57일 전  
 글 좋아요

 니닷!님께 댓글 로또 3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강하루  57일 전  
 글 잘쓰시네요

 강하루님께 댓글 로또 2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강서해  57일 전  
 강서해님께서 작가님에게 172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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