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방탄빙의글 어그러진 - W.폭음
어그러진 - W.폭음


어쩜 그리 말도 안 되는 일만 골라 일어나냐고 묻는다면 김여주는 느린 속도로 눈 한번 껌뻑이곤 본디 그런 시기라 답할 것이다. 흙먼지 일던 길바닥에 무서운 속도로 전차가 달려들고 어제까지 인사하던 남자가 깨진 대가리 부여잡고 소리 없이 죽어가는 시절. 삐꺽대며 음악 연주를 하는 전축부터 머리 위 중절모 삐뚜름하게 얹은 모단보이까지 경성은 이전과 다른 것들로 가득하다. 모든 게 전변하고 요동치는 시간 한가운데 나와 김여주만은 여전했다.


정국아 정국아 끝없이 맴도는 목소리가 마수 같은 손길이 다리로 파고든다. 도망가야 하는데 뛰어야 하는데. 움직이려 해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한참 꿈에서 시달리다 눈 떠보면 김여주는 마디마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내 뒤틀린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앞머리가 땀에 절어 축축했다. 뒤척임 느꼈는지 주무르던 것 멈추고 쳐다보는 시선이 전해졌다. 쳐다보지 마요. 끓는 목소리로 괜히 쏘아붙이면 김여주는 고분고분 시선을 치웠다. 자책 따위의 감정으로 젖어 내리깐 속눈썹이 꼴보기 싫었다. 김여주는 단단하지만 견고하지 못했다. 긁히지도 않을 것처럼 굴면서 미약한 열기에 와르르 녹아내렸다. 그 표정이 끔찍하게 싫었다. 천치 같은 김여주는 본인 때문에 사고가 벌어졌고 본인 때문에 내 다리가 다쳤다고 생각한다. 사고 후 이틀만에 깨어났을 때 김여주는 피딱지 엉겨붙은 손으로 날 붙잡고 엉엉 울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우는 모습이었다. 부와 모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잃은 나는 김여주와 함께 살게 되었고 김여주는 나의 부와 모 그리고 오른쪽 다리마냥 굴었다. 나는 정말로, 김여주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비 추적추적 내리고 선술집에서 엔카(演歌)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졌다. 여기가 경성인지 동경인지 모를 일이다.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었다. 신에 달라붙은 진흙 탓에 가뜩이나 느린 걸음 점점 느려진다. 모서리 젖어가는 일본어 교본이 거추장스러웠다. 간단한 심부름이라도 뭐 하나 부탁하는 적이 없던 김여주는 어디서 무슨 말을 주워 들었는지 나한테 일본어 공부를 시켰다. 교습소는 우리 집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다리 등신 새끼가 공부는 해서 뭣한담. 중얼거리는 소리가 김여주 귀에 들어가면 또 예의 그 표정을 할 게 뻔했기에 꾹 삼키고 김여주의 결정에 따랐다. 

空が清いです
花がきれいです

소라... 가 키요이데스. 하나가 키레에데스. 하늘이 맑아요. 꽃이 예뻐요. 쓸모짝도 없는 문장 되풀이했다. 웃을 때 구슬 소리가 나는 일본어 선생은 언어 배우는 머리가 좋다고 칭찬했다. 문장을 완벽히 외워 적으면 입 안이 아릴 정도로 단 사탕을 받았다. 교습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김여주는 늦은 저녁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호롱불 켜놓은 방에서 김여주는 그날 배운 일본어 문장을 물었다. 나는 문장을 읊으면 희미하게 웃어주는 김여주가 좋아서, 어울리지 않게 설탕범벅 사탕을 녹여먹는 김여주가 좋아서, 꼬부랑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씹어 삼켰다. 


김여주는 늦은 시간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저 꼴로 터벅터벅 한참을 걸어왔을 것이다. 기대오는 김여주를 견디지 못하는 다리가 미웠다. 다리만 멀쩡했다면 술에 꼴아 팔자로 걸어다니는 김여주를 마중 나왔을 것이다. 아니 김여주 대신 내가 일을 다녔겠지. 휘청이는 김여주를 겨우 눕혔다. 아무리 막걸리 처마셔도 귀 하나 안 붉어지는 김여주는 사케만 마시면 제정신 차리지 못했다. 잔뜩 흐트러진 팔다리 가지런히 놓고 신발 벗겨낸 후 물 적신 천으로 울긋불긋한 얼굴을 닦았다. 

"정국아."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차가운 감촉에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여주가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잔비 맞으면 금방 고뿔 걸리는 몸이다. 잘게 콜록대던 김여주가 말을 이었다. 

일본으로 유학 가는 거 어떻니.

일본. 유학. 생각지도 못한 단어들이다. 고개 돌려 김여주를 바라봤다. 옆으로 돌아 누운 탓에 야윈 등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여주가 찬찬히 말한다. 거기는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조선보단 잘 되어 있댄다. 어디든 난리겠지만 거기선... 거기선 적어도 야학이라도 다니면서 살 수 있다 하더라. 돈은 모아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구 너 일본 가서 살아라. 

모든 문장에 김여주는 없었다. 김여주는 나의 미래를 자기 없이 계획했다. 얼굴 닦던 천을 홱 내던졌다. 김여주와 등을 맞대고 누워 손톱을 씹었다. 나는 정말로... 김여주가 미웠다. 


작은 장마였다.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김여주는 간밤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었다. 나는 김여주에게 화를 낸 것을 후회했다. 오늘 밤 김여주에게 함께 일본에 가자 말할 것이라 다짐했다. 김여주와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김여주가 좋아하는 사탕도 한가득 먹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곳으로. 누나와 함께 일본에 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외출했다 돌아온 김여주가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디딤돌에 겨우 광을 낸 낡아빠진 먹색 구두 올려져있다. 김여주가 갖고 있는 유일한 구두. 아무 신 꺾어신고 다니는 김여주가 구두 신고 나가는 날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몸 일으켜 섰다. 부엌서 나온 김여주가 벽 잡고 서있는 나를 보고 느리게 눈을 껌뻑인다. 화장품 냄새가 났다. 텁텁한 분냄새와 지독한 향수 냄새. 김여주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 향을 맡자마자 뱃속에서부터 무언가 위로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누나는 왜 그러고 살아요?"

내뱉은 말에 허리 굽히고 앉아 구두 끈을 묶던 김여주가 멈칫한다. 누나는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냐구요. 그 등 향해 다시 한 번 이 악물고 악을 썼다. 눈물이 차올라서 서서히 뒤돌아보는 김여주 모습이 일렁거렸다. 그렇게 더럽게 돈 벌어야 해요? 누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요?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 목에 손바닥 자국 안고 살면서? 김여주를 향해 패악질을 해댔다. 나는 김여주가 죽을 만큼 싫었고 눈물 나게 좋았다. 나는 정말로 누나를 사랑하고 누나는 나를... 나를.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김여주가 흐릿해서 눈물을 닦았다. 김여주는 처음 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본다. 김여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이렇게 살아."

김여주는 한 글자 한 글자 힘 주어 말했다. 말한다기보다 무언가를 씹어 내뱉는 행위였다. 밤마다 구역질 이는 거 다 불태우고 따라 뒈져버리고 싶은 거 참으면서. 순간 김여주 눈이 번뜩였다. 처음 보는 형형한 눈빛이다. 나는 그 눈깔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입술을 감쳐 물었다. 연약한 살점 물어 뜯으며 참아 봐도 눈물이 배어나온다. 입술에서 피 비칠만큼 세게 물어뜯은 김여주 잠시 숨 고르더니 마저 말을 잇는다. 다들 나처럼 이렇게 산다고. 파리한 김여주의 얼굴. 나는 눈을 느리게 껌뻑인다. 꼭 김여주처럼. 결국 눈물이 길을 타고 뚝뚝 흘러내린다. 

눈물 닦고 밥 챙겨 먹어. 고기 반찬 해 놓았으니까 식기 전에 먹어라. 

김여주는 다시 텅 빈 눈깔로 돌아왔다. 짧게 덧붙이고 대문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주저앉았다. 죄책감으로 점철된 생애가 못견디게 싫었다. 곪고 곪아 파헤져진 상처가 싫었고 척이란 척은 다 하면서 물러 빠진 김여주가 싫었다. 비린내 나는 어린 내 사랑. 어그러진 한쪽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나는 정말로...... 김여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추천하기 3   즐겨찾기 등록
글이 재미있었다면 작가님에게 포인트 선물을 해주세요.
나의 Point :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작가님에게
추천수와 선물받은 포인트 합산을 기준으로 글의 순위가 결정됩니다.




폭음 작가님의 다른글 보기       전체보기
[현재글] 어그러진
거꾸로 읽어보세요
    로그인 후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댓글
  이화유린  2일 전  
 정말... 이건 너무 아련해서 제 맘을 후들겨 패네요..ㅠㅠ(?) 여하튼 글 잘 읽고 갑니다ㅠㅠ

 답글 0
  결격  2일 전  
 혹시 댓글 확인하신다면 메일도 확인해 주세요... ㅜㅜ

 결격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결격  2일 전  
 결격님께서 작가님에게 98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결격  2일 전  
 결격님께서 작가님에게 569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김쪼쪼쪼쪼쪼꼬  2일 전  
 크으으으 글 완전 미춌다! 작가님 제 몸을 던질테니 잘 받아주세요!

 김쪼쪼쪼쪼쪼꼬님께 댓글 로또 1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결격  2일 전  
 결격님께서 작가님에게 1026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결격  2일 전  
 결격님께서 작가님에게 427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결격  2일 전  
 포금 님...

 결격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결격  2일 전  
 결격님께서 작가님에게 981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시룩끼룩  2일 전  
 시룩끼룩님께서 작가님에게 706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24 개 댓글 전체보기


친구에게 장난치기 꿀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