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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03. 이별의 경계 - W.세상을누비는고래
03. 이별의 경계 - W.세상을누비는고래


03. 이별의 경계










“이름이.”
“채여주.”
“아, 난 김석진. 밴드부는 아니고 그냥 김태형 친구.”
“알아.”
“알아?”


석진은 저를 안다며 해사하게 웃는 여주를 보며 의아하고 당황스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저도 덩달아 웃고 있음에 내색은 않았다. 살다 보면 가끔 이러한 경우가 있기는 했다. 나는 상대를 모르는데 상대가 나를 알고 있다거나, 혹은 상대는 날 모르는데 내가 상대방에 대해 먼저 알고 있다거나 하는. 알게 됨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리고 그 입장이 어떤 쪽이든 이런 순간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석진은 이상하리만치 제 앞에 선 여주라는 아이를 따라 덩달아 웃고만 있었다. 특별한 것도, 유별날 것도 없었던 첫 만남이 그랬다.


운이 좋게도 같은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태형과 석진은 비록 다른 과였어도 늘상 붙어 다녔고, 그날도 태형이 있을 밴드부 연습실을 찾아왔다가 여주를 만나게 되었다. 건반 앞에 혼자 앉아서 뚱한 얼굴로 한 음만 내리누르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쩌면 그 모습에 먼저 웃음이 났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경계심이 무너져서 인지, 낯가림이 있던 석진이 인사를 건네었던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주 보자. 나 여기 되게 잘 오거든.”


어디서 그런 말을 먼저 할 용기가 났는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뻔뻔함이 생겼는지, 그 출처는 알 수가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관계로든 여주와 가까워지고 싶었음이었다.













군대를 나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런 것이리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석진은 제 품에 고이 안긴 자료집과 무거운 가방을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쓰러지듯 소파에 기대었다. 그러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같이 수업을 듣는 정국에게 카톡이 왔었던 게 기억이나 옷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니 그새 부재중 전화까지 와 있다. 아마 석진에게 답장이 없어서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석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지금쯤 자료집을 구하지 못해 동동거리고 있을 정국에게 답장을 해주고는 손에 쥔 휴대폰마저 소파 끝으로 툭 던져 놓았다. 다 귀찮았다. 당장에 써야 할 리포트가 있었지만 우선은 좀 쉬고 싶어졌다. 잠잠하기에 이내 잊어버린 줄 알았던, 갑작스레 몰아친 여주로 인한 생각들에 가뜩이나 바쁜 머릿속이 더 엉키고 엉켜서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몰라 난감해졌다. 때문에 두통이 오는 것도 같았고.



“가만히 놔두지를 않네.”


눈을 감으면 여주에 대한 생각들로 어지럽고, 눈을 뜨면 코앞에 닥친 현실 때문에 어지럽다. 그래도 그나마 가장 조용한 곳이 집이라고, 눈이라도 좀 붙이고 말끔히 샤워라도 하고 나면 좀 나아질까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소파 한쪽에 던져둔 휴대폰이 웅웅거리며 쉬지 않고 진동을 울려댄다.


처음에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그만하겠지, 했던 누구인지 모를 상대방이 끈질기게 전화를 해대는 통에 소파 팔걸이에 몸을 반쯤 기대어 삐딱하게 누워있던 석진은 신경질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생각 없이 던져놓은 휴대폰은 앉은 자리에서 손을 뻗기에는 먼, 정확히 소파 끄트머리 쿠션 사이에 박혀 있어서 그 또한 신경질이 났다.


“뭐.”


매우 끈기가 있던 이는 다름 아닌 태형이었다.


- 나 지난번에 너네 집에 두고 간 내 가방 있잖아. 모자랑.
“언제?”
- 아, 왜. 아미랑 너네 집에서 술 먹다가 아미가 뻗은 날. 내 짐이랑 다 두고 갔잖아.
“근데 그게 뭐.”
- 내가 예전에 쓴 악보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게 그 가방에 있는 것 같아서.
“잠깐 기다려봐.”


보름 전쯤 혼자 살고 있는 석진의 집에서 거하게 술 파티 아닌 술 파티를 벌인 적이 있었다. 술을 그다지 잘 하지 못하던 아미가 그날따라 제법 같이 어울려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녹다운이 되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자고 가라고 했지만 태형은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는 웃기지도 않을 고집을 부리며 기어이 아미를 둘러메고 석진의 집을 나섰다. 대신 쓰고 있다 어디론가 던져놓은 아끼던 모자도, 가지고 온 가방도 다 두고서.


- 찾았냐?
“기다려 봐.”


그때가 언제인데 그걸 이제야 찾다니. 석진은 잠깐 동안의 제 휴식을 방해한 태형이 얄미웠다. 어째서 이런 걸 내가 친구라고 옆에 두고 있는 거지. 전화를 끊고 나면 이것부터 진지하게 좀 생각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
- 찾았어?
“이게 왜.”
- 가방 안에 악보 파일 그대로 있지?


말을 잇지 못하는 석진의 반응에 제 물건에 뭐라도 잘못된 건가 싶었던 모양인지, 태형이 휴대폰 너머로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 왔지만 석진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이게 왜 여기에. 아니, 이게 왜 아직도 여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자 속에서 다시 뒤죽박죽으로 온 마음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 김석진!


그 며칠 동안 또 어디에 두고 기억을 못 하는지 제 정신머리를 탓하며 온 거실이며, 방안이며 태형이 놓고 간 가방을 찾아다니다가 결국에 발견한 것은 결코 태형의 가방뿐만이 아니었다. 차마 헤어지고 당장에 버리지 못해서 나중에, 나중에, 하고 미루다 어느새 옷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린 여주와의 기억 상자.


“찾아놨으니까 가져가.”


잠깐 멍해져 있던 석진은 몇 번이고 제 이름을 부르며 소리를 질러대는 태형에게 뒤늦은 대답을 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


버린 줄 알았다. 그래서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버리지 못했고,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예고도 없이 비죽비죽 튀어 올라 저를 찌르던 여주와의 기억들이 어쩌면 여기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여주한테 미련이라도 남았냐고.’
‘내가 그딴 게 어디 있다고.’
‘아니면 말고.’


정말 미련이라도 남은 걸까. 그래서 자꾸 뜻하지 않게 네 얼굴이 떠오르고,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나 혼자 신경이 쓰이고, 너를 연결 짓게 되고. 너와 헤어진 게 아쉬워서, 미련이 남아서, 정말 그래서 그런 걸까. 그런데 왜? 그 모든 게 미련이라면 왜 나는 이제야 네게 미련이라는 게 생긴 걸까.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는데. 나는 널 사랑한 적이 없었는데.


여주와 볼을 맞댄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제 얼굴을 바라보는 석진의 시선이 한결 무거워졌다. 굳게 믿고 있던 어떠한 믿음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사람들은 이별의 순간이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보다 어렵다고들 했다. 하지만 사실 헤어짐은 한순간이었다.



“공연?”
“응, 우리 밴드부 공연!”
“말투가 왜 그래?”
“왜, 좀 귀엽냐?”
“꺼져.”


어디서 어쭙잖은 애교를 들이대기에 손까지 휘휘 저어대며 잔뜩 미간을 찌푸렸더니, 김태형은 그게 또 재미있다고 낄낄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어쩌자고 저딴 놈이랑 친구를 먹은 거지. 게다가 채여주를 소개해 준 것도 저놈이잖아? 석진은 잔뜩 인상을 구기고 태형을 보다가 생각의 끝에 또다시 여주가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주의 생각으로 연결 짓는다. 석진은 기가 막혔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일 년에 두 번, 밴드부의 정기 공연이 있다는 것은 석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축제 때를 제외하고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있는 공연은 오로지 밴드부의 공연만으로 이루어지는데 오래전부터 제법 명성이 있던 밴드부라 공연이 있는 날이면 축제 때 못지않은 인파가 몰리고는 했다. 석진과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다녀온 태형은 제대 이후 첫 공연이기도 했다.


“올 거지?”
“봐서.”
“잔말 말고 와. 이번에.”


사실은 갈 생각이었다. 그저 한 번 튕겨 본 것이었다.


“이번에 뭐.”
“아니다. 와서 보면 알아.”


의미심장하게 씩 웃는 태형의 얼굴이 못내 찜찜하기는 했지만 석진은 별달리 묻지 않았다. 평소 대로였다면 바른대로 불어라, 어째라 말이 많았겠지만 지금 석진의 머릿속은 이렇고 저런 것을 따질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태형아.”
“어, 왜.”
“......”
“불렀으면 말을 해.”


태형을 먼저 부른 것은 석진인데, 돌아오는 말이 없으니 태형이 그제야 악보에서 눈을 뗐다. 낡은 소파에 비스듬히 옆으로 앉아 차가운 시멘트 벽 위로 듬성듬성 휘갈겨진 낙서들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석진의 모습에 태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김석진.”


태형이 이번에는 한 톤 더 높은 목소리로 석진을 불렀다.


“태형아.”
“그래. 네가 부른 김태형, 아까부터 여기 있다.”
“채여주랑 나.”
“어.”
“사랑이 아니었어.”
“근데.”
“그런데, 그러고도 미련이라는 게 생길 수 있을까.”


사실 미련인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차라리 그저 미련이라면 떨쳐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떨쳐지지 않기에 그것이 미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반격이 시작된 터였다. 이쯤 하면 누군가 정의를 해줘야 하지 싶었다. 석진은 태형이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김석진.”
“......”
“그 낙서, 여주가 한 건 알고 있냐?”


물론 알고 있다. 함께 있었으니까.


그 어느 날, 갑작스레 내린 비에 우산이 없던 둘은 갈 곳이 없어 밴드부 연습실에서 비가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그때 역시도 중간고사 일주일 동안 강행군을 하고 난 후라 몸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석진은 머리만 닿으면 금세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 앉은 여주의 다리를 베고 누운 석진은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 제가 다리를 베고 누운 탓에 여주는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혼자 웃으며 벽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게 뭐 그렇게 재미있다고 웃고 있었는지, 허리가 꺾여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그걸 굳이 하겠다고 그러고 있는 여주의 모습에 석진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운 마음에 웃으며 여주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콩 쥐어박았었다.



‘뭐해. 벽에 낙서했다고 선배한테 이른다.’


그때는 신입생이었으니 선배의 말이라면 곧 죽어도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라는 게 있었다. 괜히 그걸 핑계 삼아 여주를 놀렸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던 여주였지만 또 금세 배시시 웃으며 그랬었다.


‘에이, 설마. 우리 석진이가 날 곤란하게 하겠어?’


처음에는 쑥스러워서 늘 웃기만 하더니 사귀고 얼마 지나서부터는 제법 능청스러워진 여주의 대꾸에 석진은 그저 푸스스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려트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낙서가 뭐야, 낙서가.’


여전히 여주의 손에 쥐어진 펜을 자연스럽게 가져오며 뚜껑을 닫아 가방에 집어넣던 석진에게 여주는 그때도 지금처럼 말갛고 해맑은 얼굴로 그랬었다.


‘내 흔적이다, 뭐. 그리고.’
‘그리고?’
‘우리의 기억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잖아. 여기 봐봐. 내가 네 이름도 적어놨는데?’


그때의 우리는 우리의 연애가 가짜가 될 줄도, 사랑이 아니게 될 줄도 몰랐다. 몰랐기에 웃을 수 있었고, 알 수 없었기에 하루하루가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고 따뜻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랑도, 우정도 될 수 없는 기억은 머물 곳이 없어 방향을 잃고 석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석진은 잠시 뻑뻑해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 끝을 냈으면 그녀와의 기억과 추억도 끝이 나야 함이 마땅했다. 하지만 기억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았고, 추억은 석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들었다.



“있을 수도 있겠지. 왜 없겠어, 2년을 사귄 건데.”


2년, 730일, 그리고 17520시간. 몇 번의 생일과 수많았던 기념일, 셀 수 없을 만큼의 눈 맞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모르는 너와의 기억들.


“하지만 말이야.”
“......”
“미련이라는 게 어떤 형태로든 아직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거든.”


어떤 형태든 어딘가에 남아 있을 마음. 헤어짐은 한순간의 찰나였다. 그래서 헤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어, 선배!”
“어?”


해가 길어진 탓에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변이 환했다. 공연은 여덟 시부터이니, 아마 제법 어두워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공연을 오라고 하던 날부터 어찌나 성화였는지, 태형이며 아미며 돌아가면서 석진을 닦달하는 통에 급기야 가려고 했던 마음도 사라질 뻔한 석진은 짜증까지 부렸더랬다. 그러나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연장에서 네놈 얼굴이 안 보이면 다시는 안 보겠다는 으름장까지 놓는데, 석진은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일부러 일찌감치 응원이라도 해주려고 왔더니, 정작 태형이나 아미는 보이지 않고 후배들 몇 명만 보인다.


“오늘 보컬 완전 짱짱하대!”


1학년들이라 그런가, 설레고 신나하는 표정도 어쩜 그리 정직하게 드러나는지. 여지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후배들의 얼굴에 석진은 마냥 어린 동생들을 보는 것처럼 흐뭇했다.


“졸업하신 선배도 오신대.”
“누구?”
“이현 선배 알아?”
“대박!”


김태형이 오라고 난리를 부린 게 이런 건가. 이현 선배는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지 한참인 선배였다. 어쩐지 보통은 신입생 1학년들이나 타 대학에서 소문을 듣고 찾은 인파가 대부분이기 마련인데, 오늘따라 고학년에 심지어 과 조교까지 몇 보이는걸 보니 아무래도 그 전설의 선배가 행차하시는 게 맞기는 한 모양이다. 밴드부도 아니면서 태형을 따라 밴드부에 줄기차게 드나들었던 석진에게 현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아마 처음 입학해서 본 공연에서 현이 졸업 전 마지막 공연을 하고 내려갔으니 못해도 4년 만인 듯싶다. 따로 인사를 가야 하나, 어쩌나 하는 차였다.


“맞다. 채여주 선배도 공연 참여한다던데.”


‘올 거지?’
‘봐서.’
‘잔말 말고 와. 이번에.’
‘이번에 뭐.’
‘아니다. 와서 보면 알아.’


김태형이 나를 부른 이유.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알싸해진다.


“근데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라더라.”


마지막?













아주 가끔, 김태형은 김태형이 아닐 때가 있다. 물론 숱하게 겪어서 이제는 적응이 될 법도 했지만 아직 완연히 익숙한 것이 아닌 것은 아마 아미의 옆에서 끊이지 않는 사랑을 표하는 태형이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꼽아보자면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무대 위의 김태형. 평소와는 너무 달라서 이질적이기까지 한 무대 위의 태형은 온전히 그 무대 하나만을 위해서 제 열정을 거침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오롯이 음악, 그 하나만을 위해 형형히 눈빛을 빛내면서.



‘실용음악과?’
‘어! 넌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모르지? 날아갈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난 평생 음악 속에서 살다가 죽을란다.’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하고 태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도 웃으면서 석진에게 말했었다.


‘나한테 음악 빼면 남는 거 없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무언가 한 가지에 미쳐 산다는 건 그런 걸까 싶었다. 단 한 번도 무언가에 깊이 빠져 본 적도 없고, 늘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살아온 석진에게는 태형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범위에 선 사람 같아서 이질감을 느끼고는 했는데, 아마 그날에도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은 느낄 수 없는 그 기분을 제 옆에 있는 태형은 너무도 쉽게 맛보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부러워졌지만, 석진은 그저 태형의 어깨를 툭 치는 걸로 말았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씩은 틀리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 같다.



‘꼭 설레고 뜨거워야만 사랑이냐?’


헤어지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하루아침에 여주와 이별을 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석진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 태형은 여지없이 석진을 신랄하게 쏘아붙여댔다.


‘아닌 것 같으니까 끝낸 거야. 더 이상 그 얘기 꺼내지마.’


석진은 오히려 태형에게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다. 물론 그 길로 태형과는 한동안 서먹한 사이까지 벌어져야 했다. 아마 그것은 석진이나 여주, 두 사람의 연애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태형 역시도 그들의 이별과 함께 상처를 받았기에 그러했을 것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석진은 그를 이해했다. 그러나 태형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언가에 미쳐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떠한 것이라도 뜨겁고 설레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공허함과 시작점이 어딘지 알지 못하는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다. 석진은 그것이 가장 견딜 수 없었다.


“여러분, 즐거우신가요?”


아미의 노래가 끝이 나고 공연은 어느덧 중반부를 넘어서고 있었다. 머리색이 바뀐 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석진은 여태 공연을 허투루 보고 있었음을 느꼈다.


“다음 무대는, 어.”


슬쩍 제 쪽을 쳐다보는 아미의 얼굴에 석진은 다음 무대의 순서를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무대가 될 것 같아서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맞다. 채여주 선배도 공연 참여한다던데.’
‘근데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라더라.’


기다리던 밴드부의 공연에 신나하던 후배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석진은 무대 위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미를 바라보는데 아미는 그런 저를 내려다보며 슬쩍 웃은 것도 같았다.


“이번에도 큰 박수 부탁드릴게요!”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자 공연장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석진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여주의 얼굴을, 그리고 무대 위 마이크 앞에 선 여주의 모습을. 태연한 척을 하면서도 긴장을 했는지 제법 굳어진 그녀의 표정을. 하나하나 쫓아가고 있는 제 눈동자를 이제는 제어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나. 쉬이 그 모양새가 너무도 기가 막혀 터무니없는 웃음마저 터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문득 여주가 밴드부 보컬 자리에 합격을 하고, 그 해 가을에 첫 무대에 올라설 때가 떠올랐다.


‘아, 떨려!’
‘많이 떨려?’
‘나 올라가서 실수하면 어쩌지?’
‘괜찮아. 잘 할 거야.’
‘가사라도 까먹으면 으, 끔찍해.’
‘나도 너랑 같이 있는 마음으로 있을게. 그러니까 잘하자, 여주야.’
‘석진아.’


헤어지는 당시에는 단순히 놓여 진 이별의 상황이 가장 컸기에 다른 것들은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만이 모든 것을 다 가로막고 있었고, 석진은 아주 쉽게 그것들로 인해 두 눈이 가려지고 두 귀가 먹혀들어갔다. 그래서 기억과 추억이 생각보다 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착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기억은 숱하게 석진의 머릿속을 깜빡였고, 추억은 쉴 새 없이 석진의 마음을 두드렸다. 매 순간순간마다 여주는 함께였다.









“오늘이 된 어제처럼 쌓여가는 시간들도.”


어둠이 내렸던 무대 위에 선 여주에게로 하나의 조명이 켜지는 순간, 두 눈을 감고 있는 여주의 얼굴이 석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이 된 어제처럼, 쌓여가는 시간들도, 내뱉는 숨결까지도 아름다웠던 날들도.




“... 채여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잠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석진을 어지럽히고 든다. 그날의 너도 두 눈을 감고 설렘과 긴장감 가득한 떨림으로 지금의 이 노래를 불렀다. 비록 서툴렀지만 풋풋하던 그때와, 다소 긴장은 했어도 태연하고 담담한 지금의 너와는 분명 다른 너지만, 그때의 네 바람처럼 나는.


지나간 네 추억마저 지우고 싶던 내게도
따뜻한 미소로 나를 안아주던 너에게도
뜨거웠던 마음들이 잠들어 갈 곳을 잃어
단 한 번도 뜨겁지 않았던 것처럼 낯선 모습을 한



‘석진아.’
‘어?’
‘내 첫사랑이 너잖아. 내 마지막에도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난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채여주.”


그때의 네 바람처럼 나는 거짓말처럼 네 앞에 서 있다. 처음의 네 앞에도,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지금의 네 앞에도.


스무 살의 우리. 그리고 지금의 너와 나.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걸까. 더는 갈 수 없는데. 지울 수도, 남길 수도 없는 너의 흔적만 남았는데.


석진의 시선이 여주의 시선과 맞부딪혔다. 그러나 석진은 이제 피하지 않았다. 여주는 노래가 끝이 날 때까지 석진을, 석진은 여주가 마지막 무대를 다 할 때까지 한참이고 여주를 바라보았다. 석진은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여주의 시선에, 그동안 무수히 피어오르던 난제들을 한꺼번에 잠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 걸까. 정말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너는 이별을 하기는 한 걸까.


“여주야.”


석진은 여주는 들리지 않을 그 이름을 혼자 되뇌어보았다. 그리고 그 난제들에 대한 하나의 답을 스스로에게 고했다.


나는 이별하지 못했어. 아마도 나는 이별의 경계에 서서야 네가 보이는 것 같아.




















유류해 님(624)
what2do 님(85)
김녜린 님(44)


항상 감사합니다!



















다음화는 석진이와 여주의 과거 연애사가 나옵니다.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알게되겠죠? ㅎㅎ
이 글은 연재가 빠르지는 않아서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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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선물실  6일 전  
 석진씌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극에 달한 화였던 것 같아요! 그걸 심리묘사로 하나하나 표현하는 고래 님ㅜㅠㅜ 역시 최곱니다ㅜㅠㅠㅜ♥

 선물실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방탄빠순이유진  6일 전  
 작가님!! 작가님 글은 항상 느끼는거지만 뭔가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있는거같아요!! 말로 다 설명할수는 없지만 그런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ㅠㅠ

 방탄빠순이유진님께 댓글 로또 1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우리영  7일 전  
 아니ㅠㅠ진짜 너무 재밌어여 정말 대작입니다ㅠ

 우리영님께 댓글 로또 1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우리영  7일 전  
 우리영님께서 작가님에게 284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이엠~  7일 전  
 여주... 그거 석진오빠 생각해서 한거야...?

 ~이엠~님께 댓글 로또 1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하얀제비꽃  7일 전  
 너무 재밌어요ㅠ

 하얀제비꽃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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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빈SEOBIN  7일 전  
 고래님은 내 맘을 넘후 잘 알아 ㅠㅠ 글 겁나 좋자나요 ㅠㅠ 사랑해오 알럽유 움마 쪽 ❤

 서빈SEOBIN님께 댓글 로또 2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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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례은  7일 전  
 정말 너무 재밌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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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윤지짱짱맨뿡뿡♡♡  7일 전  
 우리로 시작했지만 남으로 끝났네요...
 여주의 무대로 연인의 사이를 설명하시는 그분..!!
 세.누.고.래!!!!!!!!!!!

 민윤지짱짱맨뿡뿡♡♡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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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밤  7일 전  
 재미있게보고가요ㅠ

 7월밤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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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개 댓글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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