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친구에게 장난치기 꿀팁
방탄빙의글 주동 上 - W.향월
주동 上 - W.향월


주동

 


作 l 향월

 


 



跓冬 上

 


연은 미친 듯이 눈을 쓸어냈다. 더는 쓸어낼 눈이 없는데도 박박 빗자루를 움직여댔다. 볏짚으로 만든 허울 뿐인 빗자루가 그대로 목이 꺾였다. 이놈의 빗자루는 말도 안 듣네. 연은 아랫부분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빗자루를 내팽겨쳤다. 밉게 생긴 것이 꼭 누굴 닮아서 신경 쓰이게 했다. 빗자루 위로 멎었던 눈보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에 연은 난로 안에 장작을 지피고 있었다. 기죽었던 불꽃이 다시 살아나는 걸 보자마자 연이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똑.똑. 작게 울려퍼지는 두드림의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또 자는 건가. 매번 묵음으로 답하던 녀석이었지만 이번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의 시선에 담긴 건 어질러진 이부자리와 굴러 떨어진 베개였다. 이 녀석 나갔나? 외출하려는 사람치고는 옷장이 가지런했다.

 


어디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어 전화를 걸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느린 탓에 바쁘게 움직여댔다. 이어 전화가 연결되고 신호가 길게 늘어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호에 연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허나, 신호를 뚫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빠져 기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녀석의 음성이었다.

 


- ..전화했어요?

"너 어디야."

- 여기..모르겠어요. 주변에 눈도 많고 공기도 차가워.

- 봐요. 입김 나오는 거. 겨울이..왔나 봐요.

"어딘지 대답하라니까. 눈은 나랑 보러 가도 되잖아."

- 나 혼자 볼래요. 같이 보면..너무 슬픈 걸.

 


끝까지 도착점을 밝히지 않고 국은 전화를 끊었다. 아무 의미 없는 전화를 책상에 덮어두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국은 항상 이랬다. 연 자신도 모르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꾸지람을 들을 순간순간 국은 눈을 보고 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녀석을 미워할 수 없다. 국이 누웠던 자리에서 국의 향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국은 복숭아 향을 좋아했다. 녀석에 비해 난 복숭아 향을 싫어했다. 그래서 국이 아침마다 복숭아 향을 뿌려댈 때마다 질색을 내뱉었다. 얼마나 뿌려댄 건지 폐가 다 아파올 정도였다. 그만 뿌려대라고 소리쳐도 더 뿌렸다. 국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이 향을 맡아야만 살 수 있다며 기어이 가방 안에 복숭아 향 디퓨저를 집어넣었다.

 


"갔다올게요. 오늘은 일찍 들어올게."


"약속 꼭 지켜. 너 어제도 어겼으면서."


"알았어요. 진짜로 약속."

 


국은 외출한답시고 한 쪽 어깨에 가방을 걸쳤다. 이번엔 눈을 보러 가지 않는 것 같았다. 국이 옷 차림을 바르게 하고 머리까지 감은 걸 보았다. 어디 가냐고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국은 또 다시 침묵으로 답할 것이다. 연은 손을 흔들며 국을 배웅했다.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됐을 때 연은 문을 닫았다. 익숙했다. 국은 아침에 연은 점심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국을 배웅했으니 연도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박하 향 삼푸로 머리를 감고 단정한 정장을 갖췄다.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고 헤어 스프레이로 마무리했다. 소파에 올려놓은 가방을 챙기고 연마저 집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연은 직원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연은 회사에서 부장이라는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 그렇다고 높은 것도 아니었다. 위에는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사람들이 존재했다. 연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직원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저런 사람이 사장이 되어야 한다. 저렇게 상냥하고 똑똑한데 부장을 하기엔 너무 안타깝다. 연은 안 듣는 척 하면서도 다 듣고 있었다. 현실이 이런 걸 당신들이 알기나 할까. 연은 바닥까지 탈탈 털어 커피를 마셨다. 쪼그라든 종이컵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연의 참을성도 서서히 바닥나고 있었다. 언제까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까 싶었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내고 때려치고 싶었지만 국을 위해서라도 참았다. 국에게 더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것만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준은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했다. 그토록 국이 바라고 바라던 눈을 보여줄 거라는 다짐 하나로 버텼다. 2시간만 지나면, 국을 보러 갈 수 있다.

 


연의 집중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시각, 직원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퇴근할 시각이었다. 6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에 연은 겉옷을 갖추고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밝은 미소로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답답했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1층 주차장엔 많은 차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연은 손가락을 까닥하고 움직여 차 키를 눌렀다. 그러자 한 쪽에서 밝은 불빛을 내뿜었다. 연은 곧장 차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좌석에 앉아 자연스럽게 열쇠 구멍에 키를 꽃았다. 구멍에 꽃힌 차 키를 옆으로 돌리자 차가 예열되기 시작했다. 연은 안전벨트를 메고 핸들을 잡았다. 그녀의 목적지는 언제나 집이었다.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밀렸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졌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초록불로 변한 시점에도 차들은 미동이 없었다. 마치 늘어붙은 껌 마냥 떨어지지 않는다. 연은 답답한 마음에 클락슨을 울렸다. 미친 듯이 서너번은 눌러댔다. 주변에서 아우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들도 빨리 이 도로를 통과하고 싶은 건 똑같았을 테니까. 클락슨의 효과가 일어났는지 옆 차선에 공간이 생겼다. 연은 사이드미러로 차가 오는지를 확인하고 옆으로 핸들을 틀었다. 그제서야 원활하게 움직이는 바퀴였다. 다급했던 연이 다시 한번 확인했던 손목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연은 엑셀을 밟고 차를 몰았다. 갈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달렸다. 지금이면 방 안에서 혼자 자신을 기다릴 국이 떠오른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연은 엑셀을 더 세게 밟았다.

 


7시의 끝자락이 되어서야 연이 집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어둠만이 자욱한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연은 국의 방문을 열었다. 온통 캄캄해 보이지 않았으나 창문 틈새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이 국을 비추고 있었다. 국은 작게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국아. 연이 국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온기에 움찔하던 국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입던 옷 그대로였다. 국은 웅얼거리며 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왜 이제 와요. 미안. 차가 밀려서 늦었어. 연이 뽀루퉁해진 국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달랬다.

 


"내가 약속 지키니까 누나가 늦네요."


"야. 차가 밀려서 그랬다니까? 치사하게."


"약속 지켰으니까, 다음에 저 늦게 들어와도 한번 봐주는 거 알죠?"


"너 마음대로 해."

 


하여튼 널 어떻게 말려. 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국은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그러면서 연을 더 꽉 안았다. 삐짐이 풀렸는지 국이 어리광을 부렸다. 연이 답답한 기분에 국의 어깨를 미는 시늉을 하자 국은 연의 팔을 툭툭 때렸다. 꽤 아픈 통증에 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파. 왜 이렇게 힘이 세졌어."


"이거 살살 건드린 건데. 누나가 약해서 그래요."


"그러면 너는 나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크잖아."

"왜 자꾸 나한테 안기는지 모르겠다."


"누나 온기가 좋아요. 다른 따뜻한 건 못 만지겠어."

 


국은 연의 온기를 좋아했다. 쬐약볕이 내리쬐는 여름과 냉기가 내려앉은 겨울. 여름엔 이열치열이라고 겨울엔 추워서 좋아한다고 했다. 연의 온기에 국의 복숭아 향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계속 안고 있는 국이 바보 같다. 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국이 연을 안을 때 연이 작게 기침을 한다는 사실. 국은 알고 있다. 연은 자신이 쓰는 향기를 싫어한다. 원체 복숭아를 싫어하던 연이라 되도록 사용을 자제했다. 자제한 게 그 정도까지라서 어쩔 수 없었다. 연의 온기보다 복숭아 향이 아주 조금 더 필요했다. 왜냐면 연의 온기가 없어도 하루는 버틸 수 있으나 복숭아 향이 없다? 하루도 못 버티는 국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언제가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어째서 국이 복숭아 향에 매달리는 이유. 궁금증이 많았지만 덮어두었다. 알았다가는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다는 게 변명이었다.

 


연이 국을 다시 안았을 때 배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동시에 울려퍼졌다. 둘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뭐 먹을래? 연은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자고 물었다. 라면이요. 누나가 끓여준 라면. 국은 자동으로 라면이라고 했다. 연이 끓여준 라면이 먹고 싶다며 국은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연은 바닥에서 일어나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을 열어 보이는 건 라면 일곱 봉지였다. 오늘 먹고 나면 네 봉지 정도 남겠다. 세 봉지 중 절반 이상이 다 국의 입으로 들어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이 라면 세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냄비에 물을 부었다. 물을 담은 냄비를 인덕션 위에 올렸다. 물이 끓을 때까지 라면 세 봉지에 들어 있는 면을 부쉈다. 어느 정도 물방울이 생긴 시점에 스프를 쏟아넣었다. 그리고 바글바글 끓을 때 면을 넣고 풀어주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젓던 연은 국을 불렀다. 국아. 여기 수저랑 젓가락 좀 놔. 알았어요. 연은 라면 담당 국은 식탁 담당이었다. 삼 분이 지나고 다 끓여진 라면을 연이 식탁으로 옮겼다. 김이 모락모락 새어나왔다.

 


연은 라면을 한 가득 떠 먼저 국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국은 그릇을 받고 곧바로 라면을 먹었다. 크게 한 입 물었다. 오물오물 씹는 국이 토끼나 다름없었다. 당근 먹는 토끼와 똑같았다. 그 모습이 흐뭇해 계속 지켜보았다. 국은 라면을 먹다 말고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똘망똘망하게 커진 눈동자. 마저 먹던 라면을 삼키고 국이 말했다.

 


"누나는 안 먹어요? 맛있는데."


"너 많이 먹어. 딱히 생각 없어서."


"그럼 저 누나 거까지 먹을래요."

 


연은 국의 그릇에 자신의 라면을 덜어주고 냄비에 남은 라면까지 주었다. 라면을 먹으며 행복한 국이 대견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돈도 버는데 고작 라면밖에 사주지 못해서. 밖은 차디찬 겨울인데 따뜻한 옷 한 벌 사주지 못해서. 그러다가도 해맑은 국을 보면 또 웃게 된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연은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감은 사이에 국의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연은 그릇들과 수저들을 냄비와 함께 싱크대로 가져갔다. 수도꼭지를 틀어 물로 한번 헹구고 주방 세제를 펌프질했다. 수세미에 두 번 짜내고 그릇에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물에 씻어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물기마저 닦아내자 말끔해졌다. 연이 고무장갑을 벗고 싱크대에 걸어놓았다.

 


연은 옷을 갈아 입고 잠에 들 준비를 했다. 9시 정도면 이른 시각이었다. 보통이면 12시가 넘어서 잠에 들겠지만 9시는 국이 잠이 드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국이 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누워 있던 연은 몸을 일으켰다. 안 자고 뭐해. 연의 물음에도 말없이 서서 베개를 안고 있던 국은 그대로 연의 침대에 몸을 맡겼다. 연은 할 수 없이 불을 끄고 창문까지 굳게 닫은 다음 다시 누웠다. 옆으로 몸을 돌려 마주한 국의 얼굴. 국의 눈이 반쯤 감겼다. 졸음을 깨려고 국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연은 국의 손을 잡으면서 국을 불렀다.

 


"..국아."


"네.."


"안 자고 뭐했어. 피곤할 텐데."


"추워서요. 도저히 못 자겠더라고."

 


연은 궁금했다. 왜 국이 9시가 됐는데도 잠에 들지 않았는지. 이유는 간단했다. 국은 추워서 연의 방에 왔다고 했다. 그랬다. 애초부터 이 집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여름에는 미친 듯이 덥고 겨울엔 미친 듯이 추웠다. 그랬던 탓인지 국이 연의 방에 온 것이 당연할 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국은, 연의 온기를 원했다. 추울 때 가장 생각나는 인간 난로였다. 연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 우리 나중에 꼭 이사 가자. 좋은 데로 가서 라면 말고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국은 맞잡은 연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아요. 난 지금이 좋은 걸. 긍정으로 대꾸한 국이 이불을 덮고 연의 품에 안겼다. 7시, 자신의 방에서 연에게 안겼을 때처럼.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회사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잠에 푹 빠져 있는 국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클렌징 폼을 가득 묻히고 얼굴에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까보다 깔끔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연이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셔츠의 깃을 세우고 넥타이를 매는 작업도 섬세하게 챙겼다. 회사에 갈 준비가 되어서야 동이 텄다. 연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국을 깨웠다. 국은 일어나기 싫다는 듯 뒤척거렸다. 1분만요..1분만. 나 지금 나가야 돼 국아. 국의 잠을 깨우는 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똑같았다. 한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꿈틀대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피곤함이 묻어 있는 국의 볼을 연이 꼬집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살살 만지다가 좀 더 힘을 실었다. 국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칭얼대다가 정신을 차렸다. 연은 국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했다. 국이 비비적거리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국은 연이 회사에 가야 하는 걸 알고 몽롱한 몸을 일으켜 그의 손에 가방을 쥐어주었다. 손으로 찰싹 얼굴을 때리면서 연을 배웅했다. 잠옷만 입어서 꽤 추운 한기에 국이 살짝 몸을 떨었다. 연은 걸어가다가 말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연이 메고 있던 목도리를 국의 목에 감겨주었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 밥 해놨으니까 먼저 먹고 있어."


"많이..늦어요? 나 자기 전엔 올 거죠?"


"응. 너 자기 전엔 꼭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다녀올게. 연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 차를 몰았다. 국은 연의 목도리를 꼭 안고 집에 들어왔다. 어젠 눈을 핑계 삼아 밖에 나갔지만 오늘은 딱히 나갈 기분이 아니었다. 연이 없어서 놀아줄 사람도 없다. 심심해 죽겠다. 국이 한숨을 쉬며 다시 누우려던 찰나 무언가가 팔을 스쳤다. 동시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국은 떨어진 물건을 주워 살펴보았다. 모양은 온도계처럼 부리가 있었다.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준의 것이 틀림없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감이 잡힐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본 물건이었다. 위쪽 부분에 버튼처럼 누르는 게 있었다. 그걸 누르자 입 속으로 공기가 훅 들어왔다.

 


"호흡기..?"

 


국은 떠올렸다. 연을 껴안았을 때 연이 작게나마 기침을 한 광경을. 그랬기에 이게 정말 호흡기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람 넣는 기계인지 국은 확인해야 했다. 국은 황급히 옷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흡기를 한 손에 꽉 쥐고 길고 긴 도로를 내달리면서.

 


한 시간의 여정 끝에 국은 약국 앞에 도착했다.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골랐다. 단단한 문을 열고 들어선 약국은 널찍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약품들과 밴드. 감기약이 일렬로 전시되어 있었다. 국은 차분하게 약사가 있는 데스크로 걸어갔다. 무슨 약을 찾나며 물어보는 약사의 질문에 국이 호흡기를 꺼내들었다.

 


"이게, 호흡기가 맞나요?"


"음..호흡기네요."


"그럼 무슨 호흡기죠."


"천식 호흡기는 아니지만 호흡이 불안정한 분들이 쓰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궁금하셔서 오신 건가요?"

 

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사는 괜찮다는 듯 또 오라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국이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약국을 나왔다. 천식 호흡기가 아니라 안심했건만 이것도 호흡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쓰는 호흡기였다. 연은 말하지 않았다. 호흡이 불안한 걸 알았다면 연을 마구 껴안았을 일도 없었다. 국이 무거운 걸음으로 도로 위를 가로질렀다. 겹쳐 입은 옷에서 땀이 차올랐다. 날씨는 춥기에 그지없었다. 반비례였다. 입김이 뿌옇게 흐리는 공기가 무색하게 더위를 느꼈다. 더위를 잊고자 국은 고개를 숙였다. 맞닿은 턱 끝에 연의 머플러가 쓸렸다. 희미하게 연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미 국은 익숙해졌다. 연의 온기를 느끼는 것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누나. 안에 있어요?"

 


달이 뜨는 시간에 가까워질 때 국은 돌아왔다.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넣기 전 신발장을 확인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 한 켤레. 연이 집에 있다. 국이 똑똑 노크를 하고 연을 불렀다. 연은 국을 보자마자 살짝 소리를 높였다. 왜 내 말 안 들어. 내가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국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저 연의 반응만 생각했다. 지금 저가 들고 있는 물건을 본다면, 달라지는 반응을. 누나. 제가 이걸 보여준다고 하면은 어떨 것 같아요? 국은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이 말을 곱씹고 삼켰다. 섣불리 꺼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국아. 왜 그랬어."


"말해봐. 밖에 나간 이유가 뭔데. 눈 보러? 바람 쐬러?"

 


지금이 딱 적절했다. 국의 궁금증을 유일히 풀어줄 순간이다. 국은 주머니 속에서 호흡기를 꺼냈다. 그걸 굳이 연의 시선에 들어오게끔 보여주었다. 그 짧은 찰나에 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혹감이 표정을 물들였다. 너가..이걸 어떻게. 연이 말을 더듬었다. 평소 말끔한 말투로 말하던 연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그런 연을 향해 국은 담담하게 답했다.

 


"누나 방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처음엔 뭔가 했는데."


"호흡기라고 약사라 그러더라. 불안정한 호흡을 안정시키는 도구라면서."

 


국은 호흡을 골랐다. 이걸 말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목구멍에 차올라 겨우 내뱉은 국의 물음이었다. 근데 누나. ..왜 말 안 했어요? 말 해줬으면 안 그랬어. 내가 누나를 껴안지 않았을 거 아냐. 국은 울다시피 했다. 연이 미워서. 미워 죽겠어서.

 

순간 불안정한 호흡이 멎어들었다.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불규칙했던 숨이 서서히 멈췄다.

 

너의 호흡에 내 호흡도 함께 섞여 들어갈 수 있을까.

 

 

 

-

오랜만에 올리네요 이번 글은 상 하 편으로 나눠집니다 원본은 따로 있고 이건 수정본 편하게 읽어주세요

 

 


추천하기 1   즐겨찾기 등록
글이 재미있었다면 작가님에게 포인트 선물을 해주세요.
나의 Point :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작가님에게
추천수와 선물받은 포인트 합산을 기준으로 글의 순위가 결정됩니다.




향월 작가님의 다른글 보기       전체보기
    로그인 후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댓글
  제인•_•  26일 전  
 월님 오랜만이에요... 아.. 이번 글.. 하 편이 또 있다니 넘 좋아요 진짜 이거 너무 좋은거 아닌가요ㅜㅜㅜㅜㅜ

 제인•_•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반쪽마법사  29일 전  
 반쪽마법사님께서 작가님에게 11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반쪽마법사  29일 전  
 향월이 사랑해 글 못쓴다더니 완전 잘쓰구만 ㅡㅡ ㅠㅠㅠㅠㅠㅠ
 

 반쪽마법사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태오보  31일 전  
 사랑해요ㅠㅠㅜㅠㅜㅜㅜ

 태오보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별보배  32일 전  
 글 넘 조아요 잘 보다 가요 !!♡

 답글 1
  의현둥  32일 전  
 헐 글 넘 최고............................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잘읽구가ㅜㅜㅜㅜ수고햇어 글 쓰느라ㅠㅠ!!!!!

 의현둥님께 댓글 로또 1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ᵔᗜᵔ  32일 전  
 쥐차.... 글 쓰느라 고생 많았어ㅠㅠㅠ 진짜 글 대박 잘 써 ;-; 믿고 읽는 문 글..ㅠㅠㅠ
 ❤❤

 ᵔᗜᵔ님께 댓글 로또 1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강하루  32일 전  
 글 잘쓰시네요

 답글 1
  하령ㅤ  32일 전  
 하령ㅤ님께서 작가님에게 500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입꾹잉  32일 전  
 입꾹잉님께서 작가님에게 66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11 개 댓글 전체보기


친구에게 장난치기 꿀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