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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작당글 시클라멘이 흩어진 자리엔 히비스커스를 들고 있는 김석진이 서 있었다. - W.김애언
작당글 시클라멘이 흩어진 자리엔 히비스커스를 들고 있는 김석진이 서 있었다. - W.김애언
시클라멘이 흩어진 자리엔 히비스커스를 들고 있는 김석진이 서 있었다.











w. 안개초를 쥔 작도생
[김애언]

안개초; 간절한 마음










※ 본 글은 모두 픽션입니다.
또한, 본 글은 죽음이 묘사되어 있으니 감상에 유의해 주세요






● 부추꽃

; 무한한 슬픔

나는, 우리의 끝과 죽어가는 네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과거의 나를 원망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방금 문장을 잉크와 깃펜으로 바래어버린 종이에 적어내자, 석진은 문득 예전 생각도 나고,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늘 그 종착지점은 고통 속에 절규하고 무기력하게 있는 자신에 대한 비판적이기 짝이 없는 고찰이었다. 고통속에 절규한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길래 늘 석진이 자신의 처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평소에는 생각할 일도 잘 없는 말이니. 애초에 평생에 몇번 생각할까 말까 하는 정도일 뿐인 뉘앙스의 말이니까. 만일 석진이 과거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더라면 전혀 머릿속에 담아 놓지도 않았을 말이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 묻는다 해도 또래에 비해 성숙한 석진도 대답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소녀를 떠나보낸 후의 석진에게 다시 물어본다면 아마도 매일매일, 그 소녀 없이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라고 대답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 둘은 친남매는 아니었으나, 서로를 그 이상으로 아꼈다. 그리고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관계 또한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목적에 의해 가까워졌다. 서로에게 고통뿐인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쉬이 살아가기 위하는 것이 열 살 정도 차이나는 그 둘의 이해관계였다. 그들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 그 덕분에 저를 집어 삼킬 것만 같은 그 방대하고 무시무시한 양의 고통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은 제법 여파가 컸다. 석진의 고통을 달래 주던 소녀가 사라졌고. 아니, 사라졌기에 석진에게 그동안 미루고 또 미루어 왔었던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물밀듯이, 거센 파도가 되어 석진을 집어 삼키려 했다. 똑바로 마주보려고 하여도 마냥 무시무시한 양의 고통이 덮쳐왔기에 제대로 마주할 수도 없었다. 석진은 더 이상 마주하기도 싫은 현실을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느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세상은 석진에게 지옥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던 것은 꿈 속에 간간히 나와 석진을 위로해 주었던 소녀였는데, 꿈 속에서도 요즘엔 도통 소녀가 보이질 않아서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가 희미해져 갈수록 배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더욱 짙어 져만 갔다. 석진이 아프면 아플수록 소녀는 희미해지며 또 미화되었다. 원래도 너무 사랑스럽지만, 왜 기억 속의 소녀와 석진이 적어놓은 일기장 속의 소녀는 괴리감이 느껴질까. 일기장 속 소녀와 내 기억 속 소녀는 한치의 의심을 할 것도 없이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



이런 생각까지 다다른 석진은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의자 등받이에 제 몸을 맡기었다. 석진은 생각했다. 현실을 피하기 위해 과거에 의존하는 내가 참, 참으로 한심하다고. 그리고 또 그 과거에 더욱이 깊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오지 못 하도록 스스로를 묶어 버리기 위해서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일은 참으로 제 자신이 역겨워지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해 온 석진이거니와, 오늘은 유달리 씁쓸함이 배가 된 것 처럼 보였다. 아마 이젠 석진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리라. 소녀가 석진 곁에 있었을 적에는, 그의 방은 항상 환한 햇빛으로 가득 잠기었다. 때때로 창문이 열려있던 봄날엔 향기로운 꽃내음이 방 안에 진동했고, 무더웠던 여름엔 조그마한 친구들이 놀러 왔고, 선선한 가을엔 바람 타고 들어온 낙엽을 주워 책갈피를 만들었고, 하얀 겨울엔 소복히 쌓이는 눈과 겨울의 그 시린 향과 장작 타는 향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석진과 소녀의 미래처럼 날씨는 항상 좋았다. 때때로 궂은 날들이 있었으나, 석진은 소녀가 곁에 있다면 어떤 날씨는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가 사라진 지금, 석진이 바라보는 세상은 덧없이 황폐하였다. 항상 맑았던 하늘은 어둡게 가려지고, 항상 꽃내음이 가득 차 있던, 작은 친구들이 놀러와 재롱을 부리던, 낙엽이 창문을 두드리던, 그리고 아름다운 눈을 소복이 쌓던 그 곳은 이제 하염없이 석진의 눈물 같은 비만 흘러 고이다 못해 이제는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석진도 날씨처럼 변하였다. 항상 총명하고 의지로 가득 차 있던 그 검은 눈동자는 이제는 총기와 의지를 잃고서 두려움과 피로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차 피폐해저만 갔다. 그 날을 이후로 석진은 아직도 집 밖을 나서는 일이 두려워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대게 집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대다수이기에, 또 직업이 다행히도 집에서도 일을 할 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하루를 보내고, 하루를 쓰고, 하루를 채우고, 또 하루를 버리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하루들이 석진을 지나쳐 갔다.





석진은 커튼이 쳐져 있는 어두운 창가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은 나풀거리는 먼지들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마치 요정들이 지나간 흔적 같아, 석진은 오래간만에 아무런 근심 없이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마저도 석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찰나였다. 찰나가 지나자 더 크게 제게 덤벼드는 공허와 외로움에 결국 박하향의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고, 부싯돌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곤 화악 불꽃이 일었다. 그 불은 담배의 끝자락에 옮겨붙어 타기 시작했다. 이내 방 안은 메케한 공기로 그득해졌다. 석진은 잠시 인상은 찡그렸으나 이내 원래의 그 권태로운 표정으로 돌아와선 연기를 깊이 들이 마시었다. 천천히 눈을 슴벅이고, 천천히 타는 담배에 아직 달라 붙어있는 재를 아무렇게나 털어 내었다. 그러다 이따금 너무 어두워서 제 옷 위로 타다 남은 담배의 재를 털 때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제 석진의 대부분의 옷에는 보기 흉한 불에 지져진 자국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석진의 몸에는 박하향과 담배 그 특유의 향이 짙게 배어버렸다. 그래서인지 이제 석진의 집 안에는 더 이상 그 소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소녀의 물건은 몇 없었으며, 그나마 그녀를 느낄 수 있는 집에 은은히, 혹은 침대에 베어있는 체향은 오래 전에 박하향과 담배의 그 메케하고 불쾌한 향으로 바뀌어 버렸다. 석진은 소녀가 사라지고 한동안 방에 베이비 파우더를 가져다 놓았다. 이따금씩, 담배의 향에 지칠 때나 소녀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 뚜껑을 열어 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용도로 쓰곤 했었다. 지금은 병은 바닥에 떨어져 깨진 그 상태로 남아있고, 남은 가루들은 재와 섞여 이젠 그 향을 전부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소녀가 석진의 곁에 남아있을 적에는 담배가 미치도록 그리워 피는 시늉을 몰래 할 때는 있더라도 끝끝내 담배를 피우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석진은 소녀가 있고 없고에 따라 모습이 상당히 달랐다. 석진 자신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어린 유년기의 자신은 제법 다정한 아이였다. 실제로도 유년기의 성격 탓인지, 제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퍽이나 다정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는 칼같이 잘라내는 단호하고 무자비하기도 하며 냉철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차츰차츰 제 영역을 좁혀나가더니, 결국 석진의 영역엔 자신도 없고 소녀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소녀가 석진과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모든 이들에게 벽을 세웠다. 소녀는, 석진이 아끼던 여동생 같은 아이였다. 아주아주 어린 시절부터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여워 그냥 두었더니, 그 이후로도 계속 쫒아다니는 소녀가 싫지 않아 친해지게 되었다. 석진과 소녀는 그 이후로 참으로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정말 깊은 우애를 지닌 남매 같았다. 아니, 피만 섞이지 않은 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눈만 마주쳐도 백이면 백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추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챙기는 낙으로 이 고달픈 세상을 살아나갔다. 서로는 서로에게 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이제 세상엔 정말 홀로 남겨져야 할 테니 말이다. 석진이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그때 소녀는 열 두살이었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 소녀는 석진에게서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본 소녀의 모습은, 환히 미소짓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화를 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젠 너무나 바래어진 추억이라 그런 거라고 석진은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석진은 그때 본 소녀의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걸 믿기 힘들어 스스로를 속이고 있던 것이고, 스스로 그 장면을 기억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소녀를 잃은 후의 석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오늘 같은 삶을 매일매일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렇게 혼자 지내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실은, 너무나 외로워 외롭다는 것도 망각해 버린 안쓰러운 소년일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직업이 되어버린 석진의 취미는 글쓰기였다. 처음부터 석진의 취미가 글쓰기였던 것은 절대 아니다. 소녀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그래서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다 보니 자연히 취미가 되어 버렸다. 소녀의 반응이 너무 좋았던 탓일까, 석진은 어디선가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글을 전부 깨쳤다. 원래도 영특한 아이였으나 배우기 어려운 언어까지 독학으로 깨칠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어찌나 열심히였는지, 문법이나 맞춤법도 독학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그제서야, 석진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는 것도 있었지만, 한번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석진은 한달에 한 권의 책을 쉬이 써내려갔다. 이제까지 혼자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수 많은 이야기들을 말이 아닌 글로 풀어내려니 처음에는 고생 꽤나 했지만, 이제는 어디 가서 팔아도 모를 정도로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석진이 소녀에게 글을 배운 이후로 써 온 편지들을 책으로 묶어내어서 소녀에게 열 세번째 생일날 선물으로 주려고 뛰어간 곳에는, 사람들이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통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주변에 석진이 다가가자, 다들 표정을 감추기 바빴다. 정적만이 감돌았고, 사람들은 석진에게 입모아 말했다. ‘그 년은 악마였어. 너까지 잃을 수는 없었어.’ 라는 어이없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주구장창 했다. 아니,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빌었다. 이들이 악마라고 칭하는 석진이 보아온 그 소녀는 악마는 커녕 천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선한 아이였는데, 태어날 적 제 어미를 죽이고 태어났단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모질게 대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오히려 그들이 더 악마 같이 보였다. 사람들은 석진을 이사시켰다. 제법 좋은 곳으로 집을 내어 주었다. 세금을 제하면 모두 그들이 낼 터이니 걱정 말고 살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악마인 것은 여전하였다. 악마들은 제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또 다른 무리의 악마들이 주변에 뭉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이미 숨을 멎어버리고 피에 절어있는 소녀만이 남아있었다. 그가 이제껏 열심히 정성을 들여 써내려간 일기라고 할 수 도 있고 편지라고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책은 그날 이후로 주인이 사라진 채 석진의 책상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 때의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입맛이 사라진 석진은 오늘도 점심을 걸렀다. 물론 식사라고 해도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빵에 너무 묽어 맛도 거의 나지 않는 수프가 끝이었지만 그것 마저도 또 거른 것이었다. 석진은 반쯤 남은 담배를 책상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남은 담배를 다시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상자 안에는 박하향 담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이런 상자가 수십개는 더 있었는데, 그것들도 분명 다 피워버린 탓에 바닥이 재투성이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담배를 사기 위해 3년만에 외출을 결심했다. 정말 오랜만에 커튼을 열고 먼지가 소복히 쌓여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제 석진은 진실로 스물 네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키도 크고, 체격도 딱 다부진 것이 누가 봐도 건장한 성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죽어있는 눈빛은 석진을 더욱 퇴폐적이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몸에 짙게 베어있는 담배의 향기는 석진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었다. 지난 이년 동안 이렇게 피폐한 삶을 살아 온 것은 고작 육 개월 뿐이었으니, 밖의 세상에선 아직 석진을 기억하는 이가 제법 많았다.



소녀의 죽음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버린 그 육 개월 전의 석진은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소녀를 악마라 칭한 정확한 이유를 알았을 때 말이다. 석진은 그냥 태어날 적에 존경받던 제 엄를 죽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보다 훨씬 천한 이유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아이를 경멸하게 만들어서 한 번 안아보기 위해서였다니.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동자들의 생각을 알지 못 하였다. 그러나 어느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그 잔당이 익명으로 편지를 써 부쳤던 것이였다. 소녀는 그 날 겁탈당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다가, 바로 앞 건물에서 몸을 던졌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악마가 죽었다며 그 날 축제를 열었다. 물론 시체 또한 아무렇게나 버려놓은 채로 말이다. 그날, 오직 석진만이 소녀의 곁에서 밤이 새도록 울었다. 물론 그 편지를 받은 날부터 일주일 동안 그 패거리들을 전부 죽을 정도로 아프지만, 죽지는 않게 두드려 패 놓았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방 안에 박혀 나오질 않았다.


● 카모마일

;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

그러나 이제 석진은 그게 소녀의 선택이라면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석진은 옷장에 있던 깨끗한 흰색 와이셔츠와 까만 색의 바지로 갈아입었다. 육 개월 동안 운동이나 외출을 하지 않았지만 그 전에 소녀를 향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것을 운동으로 토해내었기에 몸은 여전히 다부졌다. 거울을 본 석진은 한번 미소를 지어 보았다. 스스로가 뵈어도 보통 씁쓸한 미소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어젖히자, 보이는 풍경은 색달랐다. 석진이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왔었던 육개월 전의 거리와 지금의 거리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원래 종종 들리던 담배 가게는 망했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고, 복작거리던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환한 낮인데도 그랬다. 뭔가 조금 이상했지만 주변을 조금 서성이니, 박하향이 나는 향이 타는 냄새가 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석진은 망설임도 없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는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종 소리가 가게 안을 메웠다. 그러자 잠시 후, 연기 속에서 작은 여자가 나왔다. 키는 160cm 채 안되는 듯 하였고, 마른 편이었다. 그 모습은 또래보다 유달리 키가 컸던 소녀를 연상시켰다. 이 곳에서는 흔치 않은, 그리고 저와 같은 흑발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고양이를 닮았다. 눈이 제법 밝은 갈색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로 고양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녀는 석진이 들어오기 직전에서야 가게에 들어온 것인지 보닛과 약간 털이 덧데어진 파란 벨벳 망토를 벗고 있었다. 망토가 사라지고 드러난 그녀의 몸은 마르고 작은 체구였으나 굴곡진 몸이었다. 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을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석진을 향해 고양이 같은 여자가 말을 걸었다. 뭐 찾는 것이 있느냐 물어왔다. 석진은 잠시 망설이더니 박하향이 나는 담배가 있느냐 되물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뒤에 빼곡하게 들어서있는 자그마한 서랍들 중 하나를 열어 기름종이로 둘러져 리본으로 묶이고 밀랍으로 봉해진, 담배라기에는 퍽이나 값비싸 보이는 포장이었다. 석진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대충 주머니에 있는 금화의 갯수를 세어 보니 다섯 개 정도. 아마 넉넉한 양의 담배를 사기 위해 금화 다섯 개를 들고 나온 것일 테다. 여자는 10개비씩 포장되어 있고, 한 묶음에 은화 열개를 받는다고 말했다. 의외로 값싼 가격에 놀란 석진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석진은 금화 한 개를 내밀고는 한 묶음만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자는 알겠다며 손에 들고 있던 박햐향 담배들과 작은 부싯돌 몇 개를 챙겨 주며 거스름 돈을 거슬러 주었다. 얼핏 본 부싯돌이 붉었던 걸로 봐선 제법 비싼 것이리라. 석진은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왜 이렇게 값싸게 파시는 건가요." 여자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갤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띄우며 친절히 답하였다. "힘들어 보이시니까요." 원래는 제법 비싸요.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고 석진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멍해졌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순간 짓는 미소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석진은 지금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그냥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왜였을까. 그너나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 그 씁쓸한 웃음과는 조금 다른 미소를 저도 모르는 새 지어보였다. "네, 그렇네요. 조금 힘에 부치는 것 같아요." 수고하세요. 간단한 목례와 짧고 담백한 인사를 덧붙이고서 석진은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누가 쫒아오는 것도 아닌데 집까지 뛰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담배들과 함께 침대에 몸을 던지듯 뉘였다. 그리곤 무엇이 그리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짓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육 개월 만에 처음 만난 사람이라 떨려서 그랬던 것이라고,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수십번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렇지만 아까 뛰어오다가 마주친 다른 여자에게는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석진은 그 점이 고민이었다. 석진은 제발 이 감정이 첫사랑이 아니길 빌었다. 석진은 정말로 그렇게 빌었다. 아직 그 아이가 떠난지 2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모순적이게도, 그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까 그 여자를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참 곱게 생긴 사람이었다고 석진은 생각했다. 석진보다 한참 작은 키에 하얀 피부. 작은 얼굴에 용케도 오밀조밀 들어서 있는 이목구비와 투명하고 생기 넘치는 피부는 참으로 어여뻤다고 생각했다. 석진은 소녀보다 예의 그 여자가 더 예쁠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을 했다. 아아, 미쳤구나. 석진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계산할 때 한 묶음만 샀다. 분명 일주일도 채 안 돼서 10개비를 다 태울 게 빤히 보였다. 석진은 소녀를 떠나보내고 나서 엄청난 골초가 되어버렸다. 하루에 담배 두세 개비씩은 피우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예비용으로 몇 개는 따로 챙겨 놓지만 하루에 한 개비씩만 피워도 일주일 하고 삼일만 있으면 다시 그 가게를 찾아야 했다. 왜일까, 석진은 찰나였지만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분명 평소의 석진이었다면 무척이나 귀찮아 했을 것이다. 애초에 나갈 이유도 없고 말이다. 집 안에서 거의 모든 게 해결이 되는 데 무엇을 핑계로 밖으로 나간단 말일까. 운동도 집 안에서 할 수 있었다. 석진의 방에는 담뱃재가 잔뜩 쌓여있었지만 말이다.





석진은 걸을 때 마다 기침을 일으키는 먼지와 재를 보고 결심했다. 청소하기로 말이다. 청소를 하는 데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 석진이 방을 전부 치우기 위해서 새벽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정리해야 할 것이다. 무척이나 더러웠으니 말이다. 석진은 이내 몸을 일으켜서 빗자루를 두 손에 쥐고 먼지와 재들을 쓸어 내렸다. 바닥만 쓰는데 삼십 분은 더 걸린 듯 하였다. 석진은 바닥 쓸기가 이리도 힘든 걸 방금 깨달았다. 너무 더워 잠시 밖에서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예의 그 여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것에 석진은 깜짝 놀라 넘어질 뻔 하였다. 이제까지 이웃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석진이었지만 바로 옆 집에 살던 사람까지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그 육 개월 사이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여자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진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눈꼬리를 어여삐 휘었다. 그리곤 작은 입술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석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아마 지금부터 중요해질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석진은 정신을 차리고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는 옆집에 인기척이 거의 없고 가끔 담배의 향만 벽을 넘어오길래 늙은 노인이 사는 줄 알았다며 살짝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옆집에 이사를 온 지 딱 육 개월째 되었다고 말하였다. 석진은 눈만 슴벅였다. 그리고 여자를 다시 한번 찬찬히 눈에 담았다. 석진은 고갤 주억거리며 대답하였다. 지금으로부터 딱 육 개월 전부터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고 말이다. 여자는 다른 이들과 달리 석진을 이상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웃어넘겼다. 그런 모습이 석진에게 또 다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게 하였다. 발끝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감각에, 심장이 간질거리고 막 답답해지는 느낌에 결국 얼마 하지도 않은 대화를 끝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석진은 여전히 더웠다. 얼굴을 발갰고 숨을 거칠었으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럼에도, 석진은 이불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아까 찬찬히 눈에 담았던 여자를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내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파란색에 끝에 흰 천이 레이스처럼 장식된 보닛과 예의 망토를 두르고, 파란 벨벳 천에 장식이 별로 없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벨벳에서 은은하게 광이 나는 게 아마 꽤나 잘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는 달리 목에도, 손목에도, 하물며 반지도 끼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수수해 보였다. 석진은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자 더 이상 이불 속에도 있을 수 없었다. 이불을 침대 위로 던지고 튕기듯 일어나자, 석진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 손 틈 사이와 귀는 방금 전의 그것보다 배는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석진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프리지아

; 새로운 시작

석진은 자신이 이렇게 갑자기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다. 적어도 석진은 그랬다. 석진은 갑자기 찾아온 이런 다채로운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석진은 어지럽기까지 했다. 석진의 심장이 마치 괘종시계는 된 것 마냥 쿵쾅거렸다. 아주 조금이지만 숨을 쉬는 것 도 힘에 부쳤다. 답답한 마음에 아까 태우다 말았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아까 담배를 살 때 같이 주었던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한 번에 불이 붙는 건 필시 상등급일 것인데, 이런 귀한 것을 어째서 처음 보는 데다 평범한 차림을 한 자신에게 주었는지 석진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잠깐 의미부여를 하던 석진은 제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저 청소를 이어나갔다. 창문을 열고, 육개우러 내내 묵혀놓았던 벽난로를 청소하고, 책상위로 잔뜩 널부러져 있던 책들을 책꽂이에 꽂았다. 그러다 얼핏 제가 이년 전에 만들었던 소녀를 위한 책을 발견했다. 빨간 양장이 되어 있는 책이었는데, 무척이나 무거웠다. 내지는 종이여서 그리 무겁지 않을 듯 했으나 오랜만에 다시 들어 보니 제법 묵직한 것이, 어린 시절의 석진이 들기에는 조금 벅찼을 듯 하였다. 석진은 잠시 그 책을 열기를 고민하였다. 이미 석진의 기억 속에서 심하게 외곡되어버린 기억이라, 석진은 그 안에서 어떤 진실을 발견할지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그 책도 가장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넣었다. 언제든 석진이 결심한다면 꺼내어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석진은 오래간만에 청소를 한 탓인지, 외출을 한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배가 고파왔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엌으로 갔지만,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우유는 석진이 너무 오랫동안 마시지 않아서 그만 고약한 냄새가 나는 치즈가 되어 주변에 날파리들이 날아다녀 버렸고, 빵은 너무 딱딱해진 탓인지, 씹을 수 조차 없었다. 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묽은 수프 한 컵이 전부였다. 석진은 영 부족했지만 또 다시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아 침대에 누웠다. 벽을 넘어 오랜만에 맡는 맛있는 냄새가 타고 들어왔다. 아마 저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진은 굶주려 있었다. 그러나 먹을 것은 없었다. 그래서 홀로 예의 그 여자가 제게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였다. 그렇게 멍하니 침대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있던 석진을 방해한 것은 다름 아닌 노크였다. 노크, 석진은 이 년 전 부터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래서 석진에 집에 노크를 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따금 세금을 내라는 독촉장이라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 몇 통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노크라니. 석진은 잠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 석진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혹시 저녁을 아직 먹기 전이라면, 함께 저녁을 먹겠냐는 상냥한 질문과 함께 석진에게 담배 몇 개비를 더 건넸다. 석진은 잠시 당황했으나 담배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석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장서 걸었다. 석진은 맞닿은 그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귀까지 새빨개 졌지만, 역시 싫은 건 아니었다. 석진은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냥 순순히 끌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여자의 집은 저의 집과는 영 다른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다. 하얀 가구들이 즐비해 있었고, 잘 정돈이 되어 있다는, 그리고 잘 관리받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식탁으로 향하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양송이 수프와 보드라와 보이는 호밀빵이 있었다. 그리고 메인 디쉬는 찹스테이크였다. 퍽이나 맛있어 보여 석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봤는지 여자는 생글생글 미소를 띄우며 그럼 맛있는 식사 하시라고 웃으며 먼저 식기를 들었다. 여자는 작고 하얀 손으로 빵을 뜯어 수프에 찍었다. 작은 입을 벌려 빵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정말 고양이 같았다. 날카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그런 모양새에 석진은 또 한번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석진은 또 다시 다짐했다. 이 감정은 그냥 한때 지나가는 감정일 것이라고 말이다. 석진도 빵을 뜯어 수프에 듬뿍 찍었다. 입에 넣는 순간, 고소한 크림과 버섯의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호밀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드라운 빵의 감촉도 석진이 토끼눈을 뜨게 하였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눈이 마주치자 또 한번 생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 칼란디바

; 설레임


통성명도 하지 않은 것을 두 사람은 방금에서야 깨달았기에, 어색한 통성명의 시간이 이어졌다. 여자의 이름은 OOO라고 했다. 마치 석진처럼 OO도 동향의 이름 모를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그 사소한 우연에 석진은 기분이 좋았다. 이미 좋은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석진이었다. 석진도 자신을 소개하였다. 이름은 김석진이고 스물 네 상에 무직, 아마 짐작하고 있겠지만 박하 향이 나는 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사소한 것까지 덧붙여 이야기했다. 그러자 OO는 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만일 밖으로 나가는 것이 힘들담 언제든지 제게 부탁하라고 말이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는 그 말이 너무나 상냥해 보이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석진이었다. 그리고선 닭을 작게 썰어 입 안에 넣곤 오물오물거리며 석진이 무어라 말하기를 기대하는 듯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석진은 말을 하면 혀가 꼬일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결국 석진은 이 상황에서 더 먹다간 체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왜 제가 박하 향이 나는 담배를 좋아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고 잘 하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정말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한 석진과,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이상한 식사 시간은 매일 매일 계속되었다. 이제는 그냥 벽을 뚫어 종을 하나 달았다.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면, 석진은 침대에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도 일어나 거울을 한번 보고 OO의 집으로 향했다. 종종 감사의 의미를 표하기 위해 집에 있는 책 한권을 들고 가기도 하였고, 이따금 외출을 하는 날에는 꽃을 선물하는 때도 있었다. 꽃을 선물하면 그 꽃이 시들기 직전까지 화병에 꽃아놓았다가, 만일 장미라면 꽃잎을 일일히 뜯고 설탕을 뿌려서 말린 과자를 만들고, 안개꽃이라면 낙엽을 말리는 것 처럼 두꺼운 책들 아래에 깔아 압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만들어 놓은 압화로 책갈피나 펜던트 따위를 만들어 다시 석진에게 선물을 하는 날도 있었다. 그 둘의 관계는 참으로 이상했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색하고, 연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가까워서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렇지만 친구도, 연인도 아닌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이가 되었다. 석진은 여전히 그런 OO가 참 좋았다. 종종 부탁하는 박하 향의 담배들 사이에는 이따금씩 OO가 좋아하는 동향의 달고 향기로운 과실의 향이 베어있는 담배도 들어있었다. 물론 석진은 그것들은 피우지 않고 따로 보관해 두었다. OO를 닮은 까맣지만 투명한 흑요석으로 장식된 자작나무 상자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그런 이상한 나날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고, 이제는 종종 석진이 요리를 하는 날도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식사는 만들 줄 아는 것이 오믈렛 하나였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맛있다고 OO는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석진은 OO에게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다. OO는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래서 이따금 주머니에 여유가 있을 때에는 케이크를 구워 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그들만의 `관계`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석진은 여전히 OO가 좋았다. 그러나 석진은 OO의 맘을 알지 못하였다. OO도 그랬을까? 정답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석진은 늘 성실하게 OO와 식사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석진이 집 밖에서 운동을 하던 날, 그 모습을 OO가 지켜보게 되었다. 석진은 너무나 열중해 OO가 바라보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어쩌다 느껴지는 시선에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에는 언제나 방글방글 웃고 있는 OO가 손을 흔들며 과일을 사서 돌아오는 길인 것이다. 석진은 그런 OO를 향해 웃음을 내비쳤다. 땀범벅인 석진은 씻고 가겠다고, 아마 조금 늦을 것 같으니 천천히 준비하라고 말하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OO는 이상하게도 그럴 때 마다 정말 순식간에 석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도망치는 OO의 귀 끝이 붉어져 있고,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거칠어져 있고,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것을 석진은 한동안 알지 못했다. 그 사이 OO는 집으로 올라와 요리를 시작했다. 오늘은, 미리 준비해둔 애플 파이를 굽기로 결정했다. 제법 파이 구색을 갖추고 애플 파이에 격자 무늬를 만들어 올리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OO은 노크를 했는지도 모를 만큼이나 집중하고 있었기에, 결국 석진이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와 식탁에 앉았다. OO은 노래까지 부르며 신 나게 요리하다가, 화덕애서 애플파이를 꺼내어 한바퀴 빙글 돌며 식탁에 내려놓자, 그제야 석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OO은 너무 부끄러워서 한참동안이나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던 중, 운동을 하고 온 석진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OO에게 농조로 배가 고프니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넌지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런 모습에 OO는 마치 태엽을 감으면 돌아가는 인형처럼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애플파이를 그릇에 담아 잘라 석진에게 한 조각 건네었다. 석진는 포크로 한 입을 베어물었다. 정말, 달콤하고 따뜻한 애플파이여서인지,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런 석진을 잠시 보고 있던 OO는 먼저 말을 건네어 무슨 일인지 설명했다. 물론 설명을 할 건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OO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석진 앞에 있던 애플파이도 사라져 있었다. OO는 그런 석진을 보며 소리내에 웃곤 우유와 애플파이를 새로 내어주었다. 석진은 애플파이를 받아들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화사한 옷도 참 잘 어울렸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격식만 갖춘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그리고 검은 천으로 된 리본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매력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웬일인지 OO는 오늘 수수한 진주 귀걸이를 했다. 정말 더없이 OO같은 귀걸이였다. 수수하지만 고고하게 빛을 내는 것이 석진이 생각하는 OO의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졌다. 동시에 OO는 석진을 보며 생각했다. 석진이 항상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따위의 간단한 격식을 차리지 않은 옷만 입고 왔다면, 오늘도 격식을 아주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베이지색에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부드러운 실크 셔츠를 입고, 검은 정장 바지와 구두를 신고 아직 머리 끝이 살짝 젖어있는 모습이 참 석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렇게 그냥 웃기만 하다가, OO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마도 곧 약방을 이전 할 것 같다고. 그것도 아주 멀리. 석진은 순간 눈 앞이 캄캄했다. 덧붙여,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 식사일 것 같다고 말했다. OO는 몇 마디를 더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석진은, 직감했다. 진실로 오늘이 지나면 제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석진은 OO가 만지작거리던 OO의 손을 잡았다. 석진은 문득 OO의 눈을 바라보았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석진을 빨아들일 것 만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까지는 말로 하지 못 했던, 숨겨왔던 호감을 내비쳤다. 석진은 얼굴도, 귀도, 하물며 OO의 손을 잡고 있는 손끝까지도 열이 올랐다.


●튤립

; 사랑의 고백

OO가 깜짝 놀라 손을 빼려는 순간, 석진이 OO에게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이때까지 이 마음을 숨기고 외면하려 애써봤다고, 그래서 그냥 식사하는 그런 이상한 사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이제 당신을 보낼 수는 없다고, 수많은 밤을 지내며 홀로 되뇌었던 그 말을 드디어 전하고 나자, 포개어져 있는 두 사람의 손 위로 OO의 눈물이 떨어졌다. 석진은 OO를 바라보았다. OO는 붉어진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붙잡아주기를 기다렸다고, 바라왔다고 작게 고백했다. 석진은 울고 있는 OO을 달래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었다. ㄷOO이 눈물을 닦고 석진에게 웃어보이자, 석진은 OO에게서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충분히 힘들고 고달팠으니, 이제는 제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가달라고 말하는 듯 하였다.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OO은 그 집을 내놓기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던 상태라 어쩔 수 없이 짐을 정리해 석진과 같은 집에 살게 되었다.

● 메리골드

; 해피엔딩

OO은 처음 와 본 석진의 집을 구경하다, 다른 책들과 다르게 유난히 새것 같은 책을 한 권 발견하였다. 제목도 없고, 깨끗한 것이 필시 석진이 직접 제본한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OO은 석진에게 책을 가져가 무슨 책인지 물었다. 석진은 전에 여동생처럼 아끼던 아이를 위해 썼던 책이라고 설명하였다. OO은 가만히 울먹이는 석진을 안아주었다. 그날, 둘은 서로가 서로의 운명임을 직감했고, 석진과 OO은 눈도 맞추고 입도 맞추고 배도 맞추며 밤을 지새웠다. 그 후로 둘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그 집에서 오래오래 살았다.

나중에 그 둘을 결혼하게 해 주었던 -정확히 말하자면 OO의 마음을 굳히도록 해 주었던- 그 석진의 동화로 가득한 빨간 양장 책은 그 둘의 유일한 딸의 보물이 되었다. 그리고 후에도 계속 계속 그 둘의 사랑 이야기와 함께 언제까지고 책은 전해 내려가게 되었다.









시클라멘이 흩어진 자리엔 히비스커스를 들고 있는 김석진이 서 있었다.

시클라멘; 지나간 사랑
히비스커스; 새로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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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얼마 전부터 열심히 준비했는데, 2019년도 프리패스 해서 정말 기쁩니다!
작년에 네번인가 떨어지고 올해 처음 하는데 2019년도가 가기 전 작당될 줄은..
정말 다시 한번 투표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인사 드리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작품으로 만나뵙겠습니다!


즐추댓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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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오늘은 아쿠아리스트로 처음 출근하는 날이에요!
결말.
[현재글] 작당글 시클라멘이 흩어진 자리엔 히비스커스를 들고 있는 김석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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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기온희  16일 전  
 작당 축하드려요!!!!1

 답글 0
  바다의새벽  19일 전  
 바다의새벽님께서 작가님에게 1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바다의새벽  38일 전  
 작당 축하드려요!!

 바다의새벽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2
  왜다안돼냐  38일 전  
 작당 축하드려요 몰입감 쩔어요!

 왜다안돼냐님께 댓글 로또 3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석잎새  38일 전  
 석잎새님께서 작가님에게 25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4
  매력학과☆  44일 전  
 작당 축하드립니다!

 매력학과☆님께 댓글 로또 1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김단옝  45일 전  
 작당 축하드려요!

 김단옝님께 댓글 로또 1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사랑빼면원래  45일 전  
 축하드려요!

 사랑빼면원래님께 댓글 로또 2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박지민결혼해쫍쫍  45일 전  
 축하드려요!

 답글 1
  강하루  45일 전  
 작당 축하드려요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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