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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겨울나기 - W.준경
겨울나기 - W.준경









내 인생은 온통 검어
컴컴한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허연 건
너밖에 없어
유얼 마이 썬샤인 머시깽이
그거 다 나한테 너야
가슴께 갈라 심장 꺼내달라 그러면
당장이라도 내 심장 가져다 바칠 수 있고
빼먹을 등골 필요하다 그럼
내 등골 내어줄 수 있어
그게 내 사랑법이야
근사하고 거창하지 않아서 미안
네 눈길 한 번 받으려고
죽 줄 서있는 사람들처럼
나도 번호표 뽑고 기다려 볼게



너는 참 별종이었다. 너는 꽤나 까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스킨십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인 달콤한 말은 지독히도 싫어했다. 너는 나의 약점을 이용해 나를 놀리기를 좋아했다. 너는 매번 사사건건 매의 눈으로 나를 쫓으며 내 행동에 꼬투리를 잡으려 괜한 일에 힘을 빼다가 놀릴 거리가 생기면 샐쭉 얄궂게 웃어 보이곤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 온종일 그걸 가지고 나를 놀렸다. 너는 겨울만 되면 어린아이가 되었다. 혈기왕성하고 천진난만한 아이. 너는 뺨을 저미는 듯한 칼날 같은 거센 바람에도, 골이 저리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얇은 긴 팔 하나 걸친 채로 문을 박차고 나가기 일쑤였다. 그런 너의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겨들고 그를 쫓아가 챙기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난 급히 미처 불을 붙이지 못한 에쎄 담배 하나 꼬나물고 너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갔다. 너는 사각이는 소리를 내며 소복이 쌓인 눈에 발자국을 잔뜩 남기다가도 여느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뻑뻑 담배 피우던 내 코트 소매를 잡아끌고 눈 위에 드러누워 버리기도 했다. 로망이었다나, 뭐 그런 천진한 말을 주절거리면서. 너는 그렇게 한참을 찬바람 맞으며 뛰놀다 얼굴이 푸르뎅뎅해질 때 즈음, 궤짝 안을 귤들로 그들먹하게 채워두고 낡아빠진 매트리스 위에 자리한 이불 더미 속에 파묻혔다. 그러고 나서 몇 번을 봤는지 대사를 달달 외워버려서 다음 대사를 줄줄 읊을 수 있는 유치한 미국 하이틴 영화 디브이디를 재생해두고 넌 가만히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나는 그런 네가 갸우듬히 내 쪽을 돌아볼 때마다 너의 입안에 손끝이 노랗게 물들 때까지 귤을 까서 넣어주기 바빴다. 영화의 장르는 오로지 너의 취향이었다. 유독 로맨스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너의 지취.

너는 입맛도 까다로웠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너에게 내가 설탕과 프림이 잔뜩 들어간 믹스커피 대충 타서 손에 쥐여주면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도로 내 손에 쥐여주는 일이 다반사였고, 다시 허구한 날 마셔대던 샷을 세 번이나 추가한 쓰디쓴 아메리카노 손에 쥐여줘야 매가리 없이 받아들고 말갛게 웃으며 그제서야 입을 축였다.

너는 자꾸만 사랑을 심오한 메타포로 풀어내어 이야기하곤 했다. 숱한 의미가 응축되어 담겨있는 메타포로. 무지한 나로서는 도무지 그것이 사랑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도리가 없었다.

너는 여름도 싫어했다.
- 겨울이 가면, 봄이 올 테지. 봄이 가면, 여름이 올 테고, 너는 무지 싫어하겠네. 여름을 좀 좋아해 줘 봐.
- 난 여름 싫어. 그건 내 불변 사항이야, 강경 여름 배척파. 그니까 잘난 여름 너나 실컷 좋아해라, 띨띨아.
- 아니, 왜 여름 풀 내음이나 초록색 새 옷 빼입은 때깔 좋은 나무나, 그런 거 좋잖아.
여름 예찬론자가 되어 열을 띠며 여름을 변호하는 나는 여름에 지나치게 감정 이입했다. 마치 내가 여름이라도 되는 양. 나는 입이라도 꿰맨 듯 제 물음에 대답 않는 네가 미웠다.

잔뜩 쌓여있는 여행 책자를 뒤적이던 너는 매번 무표정만 고수하던 것과 달리 답지 않게 쿡쿡 웃었다. 삐죽삐죽 독 개구리처럼 심통 나고 뾰족뾰족 모난데 투성이인 모습만 보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에 파리 들어간다는 시답잖은 농담 던지며 내 한껏 벌려진 입 도로 닫아준 너는 제 낭만을 토로했다. 나에겐 실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는 체코 프라하에 가보고 싶다며 주절댔다. 모름지기 너라는 사람이라 함은 꿈도 희망도 뭣도 없는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맹신하던 나에게 네게도 꿈이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다.

너는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눌러 앉아 그림에 한참 열중하고 있는 나의 널따란 등판 한참을 바라보다 내 볼을 쿡쿡 찌르는 일이 잦았다. 넌 돌아보는 내 얼굴이 우스워서 얄궂게 웃다가 내 정갈하게 쓴 안경이 흘러내려 아슬아슬하게 코에 걸치자, 못된 심보로 툭 건드려 떨어트렸다. 두꺼운 안경에 가려졌던 내 긴 속눈썹과 옹골찬 사슴 같은 눈망울이, 흐려진 시야에 조금 찌푸린 미간이, 눈썹 조금 아래로 반듯하게 자른 검은 머리칼이 명치께가 간질거리게 만들어서 좀 울고 싶을 지경이라고 너는 웅얼거렸다. 하루 한 번 꼬박꼬박 반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단 말도 덧붙였다. 오히려 있는 사랑 없는 사랑 다 퍼부으며 티 내는 쪽은 나지만 꾸역꾸역 사랑을 눌러 담은 속이 타들어가는 건 너였다. 나는 너를 예의주시하다가 뭐가 또 불안해한지 입술이 맛난 고기라도 되는 양 꼭꼭 씹어대는 너의 입술 위로 불쑥 손 뻗어 제지했다. 너의 얼굴을 다 덮을 만큼 큰 손에 또 반해버린 게 어지간히 분했던 넌 내 손가락을 깨물어 버리고, 얼빠진 나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손가락 부여잡고 바락 소리 지르려다가도 벌겋게 상기된 너의 뺨에 내 입술 들이민다. 뭐 이렇게 예뻐서 사람이 화도 못 내게 하냐, 너는.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내가 널 좀 사랑해보겠다잖아. 너도 나한테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는 건 아니잖아, 나 때문에 마음 동한 것도 사실이고. 나는 담백하게 내 사랑을 토로했다. 자꾸 딴 놈 들먹이는 너에게, 자기에겐 메일 한 통 남기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면서 남에겐 속도 없이 잘도 실실 웃고 다니고 다정하게 구는 너에게, 심통이 잔뜩 나서 뱉은 내 퍽 우스운 설익은 사랑이었다. 초겨울의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었다. 얼렁뚱땅 따낸 사랑이었다. 두근대는 가슴에 미처 뱉어내지 못한 달뜬 숨을 마저 뱉으며 너는 몇 번이고 사랑을 속삭였다. 내가 부르주아는 아니라서 너 호강은 못 시켜줄지도 몰라. 급히 덧붙인 말에도 너는 그저 쿡쿡대며 자기보다 두 뼘은 더 큰 내 머리를 까치발 들고 서서 쓰다듬어주었다. 십이월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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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청운_靑雲  280일 전  
 단어들이 너무 이쁘고 좋아요

 답글 1
  강하루  282일 전  
 재밌네요

 답글 1
  공전선  282일 전  
 공전선님께서 작가님에게 101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하늘작가  283일 전  
 재밌었요

 하늘작가님께 댓글 로또 1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울프ᅠ  283일 전  
 울프ᅠ님께서 작가님에게 86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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