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윤기는 모든 할 수 있었다. 밤에는 아침햇살에 눈이 먼 사람처럼 기지개를 펴며 일어날 수 있었고, 몇 시간이든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무한한 고요를 느낄 수 있었다. 밀린 집안일을 하루 만에 끝낼 수도, 지금까지 봐 온 수천 개의 영화 리스트를 순서대로 읊을 수도 있었다. 대신 그는 단 한 가지는 할 수 없었다. 거실에 있는 카세트를 트는 것.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세월이 작동되는 그곳에 김석진이 세 들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 죽지 않는 평행한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 민윤기는 한편에 아이의 응석을 닮은 듯한 글씨체로 `이를테면 괜찮은 날에`라고 써놨다. 잘못 스치면 죽지만 절대 닿지는 않는 키 큰 전봇대의 전선인 듯 먼지가 눈처럼 내리 앉은 그곳에 어쩌다 시선이 떨어지면 그는 곧 심장을 꺼내놓고 울었다. 민윤기의 집에는 눈물이 이룬 바다 파편들이 즐비했다.
크리스마스가 왔고 밤이 엄습했다. 거리의 작은 나무들이 서로 눈치를 보듯 하나둘씩 몸에서 불빛을 내며 반짝였다. 광장에는 거대한 트리가 홀로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꼭대기에 박힌 별을 바라보면서 민윤기는 절망했다. 두 발이 묶인 채 꼼짝 않는 그 별이 스스로 반짝일 수 없다는 것에 무너져내렸다.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한 거짓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날 민윤기는 광장에서 김석진을 본 듯했다. 그는 겨울이 너무 아파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요란한 세상 어둠은 눈물을 건너와 모든 것과 함께 사라지는 절도범 그 산하에 사는 외로움이 바람이 되면 민윤기는 모래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기다렸다. 바람처럼 올 거야. 그 말을 굳게 믿으면서 취기에 눌린 눈꺼풀을 치켜든다. 그는 편지 앞머리에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