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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13. 우리, 사랑할 시간 - W.해늘°
13. 우리, 사랑할 시간 - W.해늘°






우리, 사랑할 시간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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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은 스태프들과 회사로 돌아와 정리를 끝내고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멀리서부터 왁자지껄한 회사 팀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소정은 다가가 이안의 어깨를 잡았다.


“어, 소정아. 왔어? 며칠 안 됐는데도 보니까 반갑네.”
“당연하죠~ 2개월 넘게 한방을 썼구만.”


사람들은 한창 회사에서 했던 춤 연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이안의 춤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려야 빠질 수 없었다.


“우리 노력상을 하나 만들자고 건의하는 건 어때? 노력상을 타면 하루 정도 마음대로 휴가권 주는 걸로 해서.”
“그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는 빼 달라고. 몰라, 난.”
“그 정도야?”


소정의 물음에 지민이 맥주잔을 든 채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걱정하지 마요. 내가 책임지고 누나 가르칠게요.”
“하하하, 그래, 우린 지민이만 믿고 가는 걸로~”


사람들은 시원한 맥주가 채워진 잔을 들어 올려 부딪쳤다. 이안은 이렇게 즐거워하며 있자니 며칠간의 가라앉았던 기분이 잊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돌아온 이후 제대로 자본 적이 별로 없었던 터라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내내 이어져 오던 두통도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의 문제는 오르는 술기운에 몰려오는 잠이었다. 술을 마실 걸 그랬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우스웠다. 이안은 잠도 깰 겸 화장실을 가려 일어섰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같이 가요 누나.”







화장실로 이어진 복도는 실내의 소란스러움과 조금 떨어져 있어 지민은 이안에게 물었다.



“누나, 졸리죠?”
“응? 그래 보였어?”
“옆에서 보는데 그런 것 같았어요.”
“취기 조금 오르니까 그렇네. 하하...”

“이따 카페에 잠깐 가실래요? 잠이 확 깰 만큼 멋진 곳인데. 제가 책임지고 집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러자.”


이안은 장난스럽게 말하는 지민에게 웃어 주었다.

차가운 물로 가볍게 얼굴을 적셨다. 이보다 더하게 잠이 부족한 때도 있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이러는 것이 점점 의사였던 몸과 정신에서 멀어지는 건가 싶은 생각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더 마시겠다는 파와 집으로 돌아가 쉬겠다는 파로 갈리었다.


“언니, 한 일주일 정도 지나면 보겠네요.”
“응, 투어 때 봐.”


“조심히 들어가요 언니. 지민아, 너도 잘 들어가고.”
“네, 누나. 들어가세요.”


사람들과 헤어져 이안과 지민은 걷기 시작했다. 늦은 밤, 평일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초여름이라 해도 밤 되니까 바람은 차다. 시원하네.”

“그러게요. 바깥에서 커피 한잔하기 딱 좋은 것 같아요.”
“가려는 데가 그런데야? 이 시간까지 해?”

“사실 회사 꼭대기예요 누나. 거기 야외 테라스 있거든요.”


지민은 웃었다.


“커피 타가지고 올라가면 돼요.”


이안도 그러자며 웃어 보였다.







휴게실에 들러 커피를 타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주변의 아경이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우와... 좋다. 멋지네.”
“이리로 앉으세요 누나.”


이안은 지민이 챙겨준 자리에 앉았다.


“맛있다 믹스커피. 이제야 취기가 다 가시는 것 같아.”

“잘 탔죠? 적당한 물의 양과 온도로 탔어요.”
“응, 아주 훌륭하다.”


야외 꼭대기라 제법 바람이 불었다.


“누나, 안 추우세요? 제가 덮을 것 갖다 드릴게요.”
“다정한 박지민. 하나도 안 춥다. 앉아서 마셔, 따뜻할 때.”


이미 지민의 마음은 따뜻했다. 특별함이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안과 함께 있으면 그랬다. 편하고 따뜻했다.


“와서도 계속 바쁜 것 같던데 몸은 괜찮아?”

“네, 한국에 와서 먹고 싶었던 것 먹고 보고 싶었던 사람도 보고 하는 게 약인가 봐요.”
“그래, 잘했네. 몸 관리 잘해야지. 얼마 안 있으면 또 미국 투어도 가야 하잖아.”
“누난... 이번에 미국 투어 다녀오면 더 이상 안 하시는 거죠?”
“응, 난 내 자리 찾아야지.”

“아쉽네요. 누나가 있어 줘서 정말 좋았는데...”


이안은 옆을 돌아보며 지민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머리를 흩뜨려 주었다.


“아직 미국 투어는 시작도 안 했어.”


지민에게 그나마 그 사실이 다행이란 느낌을 들게 했다.



“누나가 그랬죠... 너무 견디기만 하는 건 외롭다고.”


지민은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는 컵을 손에 쥐고 눈은 풍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정말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랬나 봐요. 힘들지만 잘 견디고 있다는 걸요.”


이안은 말없이 들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견디는 게 더 쉽지만... 그래도 이젠 외롭진 않은 것 같아요. 이렇게 누나한테라도 말하고 있잖아요.”


이안과 지민은 마주 보고 웃었다. 웃는 지민의 눈이 반달이었다.


“지민아, 아마 엄마도 아실 거야. 엄마는 자식의 영광보다 고통을 먼저 보시니깐. 예전에 박지성 선수 엄마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러시더라, 남들은 좋겠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안쓰럽다고. 즐길 거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매일을 연습만 하고 있다며... 가끔은 어리광 부려 봐. 괜찮다고만 하는 건 엄마에게 아픔이 될지도 몰라.”


생각하지 못한 이면의 이야기였다. 엄마에게 자신은 늘 괜찮다고만 했었다.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안, 이건 좀 주제넘었다. 넌 너대로의 생각이 있을 텐데. 그냥 내가... 나라면 그럴 것 같아서 말야.”


엄마, 참 그리운 이름. 그런 엄마가 며칠 전 꿈에 나왔던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오래도록 엄마의 느낌이 생생해 슬펐어도 다시 한번 꾸고 싶었던 꿈이었는데 아빠의 꿈과는 달리 그 꿈은 반복되지 않았다.



“아니에요. 고마워요 누나. 갑자기 엄마 보고 싶네...”


나도... 이안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이셨을까. 또렷이 보이는 것 없이 다만 느껴지기만 했던 엄마의 살갗. 엄마, 엄마... 부르며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디에도 없네, 우리 엄마.

“아직도 취기가 남았나 보다... 하하...”










우리, 사랑할 시간










이안은 동기의 개원을 축하하는 자리에 가서 몇몇 친구들을 만나 차려진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쨍한 햇빛에 어디 카페라도 들어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연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운이네 갔었냐?
“응, 갔다가 나왔지. 병원 좋더라. 깔끔하고.”
-염장 안 지르디? 걔 그거 전문이잖아.
“안 지르던데. 맞는 말만 했지.”
-맞는 말?
“그렇게 힘들게 전공의 과정 다 마치고 왜 시간 낭비하고 있냐고.”
-변태 놈.
“야, 그게 왜 변태야? 직설이지.”
-변태야, 그놈. 딴에는 직설한답시고 즐기잖아. 그게 변태지 별 게 변태야?
“지금 좀 한가 한 가보다?”
-이미 한차례 지나갔지. 그건 그렇고, 준비는 했어?
“들어가면서 사려고.”
-그래, 준비 잘해서 해. 대신 인사드려주고. 미국 투어 언제 간다고 그랬지?
“다음 주 지나서.”
-보기는 어려울 거 같고, 가기 전에 통화나 해. 영상 통화할까? 이 오빠 얼굴 보여줄게~
“그 얼굴이 그 얼굴이지, 무슨 영상통화. 일 봐.”
-알았다~ 날 더워. 엄한데 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집에 가.
“잔소리 그만하고 끊어.”


전화를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 카페를 찾아 들어가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하고 앉아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창가에는 붉은색 제라늄 꽃 화분이 놓여 있어 파란 하늘과 무척 잘 어울렸다. 이안은 어우러진 그 풍경을 카페 안에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던 페스타를 잘 마치고 다음날 멤버들은 회사에 모여 태준을 비롯해 선주와 그 외 디렉터들과 함께 미국 투어와 이후의 일정에 대한 이야기, 컨텐츠 관련 사업에 관한 회의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구축해 놓은 시스템을 기반으로 시작하는 것이라 회의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확인할 것들이 많아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자, 남은 사항에 대해선 우리끼리 다시 이야기해 보고, 너네들은 그만 가. 어제, 오늘 수고했다. 길게 못 줘 미안하지만 하루라도 잘들 쉬고. 못 보게 되더라도 미국 투어 잘 갔다 오고. 알았지?”
“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분주해진 분위기 속에서 선주가 태준에게 물었다.


“이안이, 오늘이죠?”
“응, 더 봐야 할 일 없지?”
“없어요. 차는 갖고 가세요?”
“아니, 그냥 택시 타고 가려고.”


정국은 이안이란 말에 그 분주함 속에서도 귀를 기울여 듣다 물었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일이 있어서 이안이네. 너넨 집에 안 가냐?”

“그럼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저 요새 운전 연습하고 있어요.”
“나더러 목숨을 걸으라고? 초보한테?”


곁에서 듣고 있던 다른 멤버들이 편을 들어 말해주었다.



“아니에요, 정국이 운동 신경 아시면서. 잘해요 운전. 한번 맡겨보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저 한번 타봤는데 아주 조금 무서웠어요 이사님.”


태준은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닌 표정으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 강요 아닌 강요의 분위기?”

“가세요, 모셔다 드릴게요.”


정국은 태준이 끝까지 거절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알았다. 나 지금 갈 거야. 가자.”


정국은 기쁨을 감추고 태준의 뒤를 쫓아 내려가 회사 차 운전석에 앉았다. 이안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는 지민의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사는 집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 앞이라도 보고 온 지민이 부러웠었는데. 그러다 이런 뜻밖의 기회가 생기자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즐거워했다.


“정국아, 천천히, 급히 갈 거 없다.”
“네, 걱정 마세요~”


태준이 알려준 주소대로 핸드폰으로 길을 검색해 출발했다. 초여름으로 접어들어 6시가 넘었는데도 햇빛이 길게 남아 있었다.


“정국아, 저기 모퉁이 마트 앞에 내려주고 가. 물건 사고 바로 올라가면 되니까.”

“아니에요.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내 참... 알았다.”


차에서 내린 태준이 마트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술 한 병을 들고 나오는 게 보였다. 제사 때 쓰는 술이었다.



“누구, 제사예요?”
“이안이 엄마. 오늘이 기일이라.”


마트에서 언덕길을 올라가자 태준이 세워달라 말했다.


“여기야. 조심히 들어가라. 태워다 줘서 고맙다. 심장은 아주 쬐끔 떨렸지만 뿌듯하기도 하네. 우리 막내가 이제 운전도 하고.”


태준은 웃어 보인 뒤 뒤돌아 큰 나무 한 그루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정국은 밖으로 나와 태준이 들어간 집을 바라보았다. 잎이 풍성한 나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정갈하고 소박해 보이는 지붕이 길게 뻗는 햇빛에 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어째 갈수록 다채로워진다.”


태준은 상에 놓여 있는 음식들 중 배달되어 온 음식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마다 맛난 것들이 생기잖아. 다양하게 드셔 보라고.”
“그래, 신선하다 야.”


태준과 이안은 상에 올리고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처음부터 형식 같은 것은 따지지 않은 제사였다.


“페스타는 잘했어, 삼촌?”
“내가 하냐, 애들이 하지. 잘했어. 멋지게.”
“힘들겠다. 와서 별로 쉬는 날도 없는 것 같던데.”
“그래서 미국 투어 시작하면 LA 공연 후에 휴일 줄 거야. 바닷가 근처 집 빌려서 그곳에서 쉬게 해 주려고.”
“태국처럼?”
“응, 스탭들이랑 같이.”


밤이 되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이안은 부모님 사진이 놓인 제사상 앞에서 태준이 따라주는 술잔을 올렸다.


“선생님, 좋아하시겠다. 어쨌든 전문의 됐잖아.”
“그러게... 전문의 따는 게 약속이라 지켰는데 소원 들어주겠다던 아빤 이제 들어주지도 못하시고.”
“소원이 뭐였는데?”
“그때 가서 생각하고 말하려고 했지. 정한 것도 없었어.”


자리를 바꿔 태준이 잔에 술을 받아 올렸다.





간결한 제사를 마치고 둘은 평상에 앉아 마트에서 사 온 팥빙수에 우유와 미숫가루를 넣어 먹었다.


“반년 정도 여기 살았었는데... 넌 기억 못 하지?”
“아냐, 조금 기억해. 삼촌이 가끔 놀아줬잖아.”
“의대 포기하겠다고 했다가 집에서 돈 없이 쫓겨나가지고 갈 데 없을 때 선생님이 데리고 있어 주셨는데... 사모님도 정말 잘해주셨었고. 난 아직도 김치찌개는 사모님이 해주신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세상에서 최고더라.”
“모르겠어 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삼촌이 나보다 더 많겠다.”


태준은 아직도 납골당에 안 가봤냐 묻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이안은 납골당에 아빠를 모신 이후 한 번도 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역시 팥빙수는 우유와 미숫가루가 필수야.”


태준의 말에 이안은 그저 웃었다.







태준이 가고 난 후 이안은 말려 두었던 그 꽃을 다시 한번 책을 펴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눌려져 마른 연보랏빛 꽃잎이 참 예뻤다.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사랑할 시간










정말 오랜만에 납골당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들었다. 가까워질수록 조금 긴장되어 몸이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야 하는 역의 이름이 버스 안 전광판에 떴고 일어나 내릴 준비를 했다. 정류장에 멈춰 버스의 문이 열리고 내렸을 때 예전에도 맡아봤던 것 같은 익숙한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멀리 건물이 보였다. 큰 가로수가 있는 길을 걸어 입구에 도착하고 안쪽으로 더 걸어 들어가 모셔져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 부모님은 맨 아래에서 두 번째 위치에 있어 차라리 바닥에 앉으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이안은 이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바로 가방을 열어 책 안에서 코팅지에 넣은 그 보랏빛 꽃을 꺼내 납골함이 모셔져 있는 바깥 유리문에 붙이고 일어섰다. 일어서서 발길 돌려 가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살아 있지 않은 부모님, 그저 뼛가루에 지나지 않는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겠나 싶은 비뚤어진 마음으로 오지 않았었다. 이안은 안에 들어있는 함께 웃고 계신 부모님의 사진을 바라보며 꿈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_벚꽃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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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벚꽃들이 햇빛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4월, 봄이었다. 학회 준비와 새 학기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아빠가 꽃구경 가자 약속했던 봄의 어느 토요일,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아빠만 안다는 벚꽃 명소로 가기 위해 우리는 한가한 어느 국도를 차로 달리고 있었다. 댄스와 발라드가 섞인 아빠가 좋아하는 90년대 노래 모음을 들으면서.

이안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업의 압박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맑은 공기를 양껏 들이마셨다 뱉기를 반복했다. 본과생이 된 뒤로 이런 시간을, 더군다나 아빠와 함께 보내게 된 게 대체 얼마만 인지. 그 기분을 한껏 즐기고 싶어 나오는 노래를 따라 목청껏 소리 높여 불렀다.


“우리 딸, 그동안 스트레스가 꽤 컸었나 보네. 노래 실력은 날 닮지 않아 다행이다.”
“이건 확실히 엄마 유전이야. 난 아빠처럼 박치가 아니잖아. 그래도 우리 아부지 유일하게 박자 안 놓치는 노래도 있는데 뭐. 아, 마침 나오네~”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안은 볼륨을 좀 더 높여 들었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고 말씀하시는 아빠는 엄마를 그리워하듯 이 노래를 좋아하셨다. 기억 속에선 먼 엄마지만 사진으로 남겨진 그 예쁜 미소의 엄마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상상돼서 이 노래를 들으면 알싸한 그리움이 가슴속에 퍼지곤 했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끝까지 따라 부른 적은 없었다. 이젠 안녕이라 말하는 그 가사가 예전 어린 맘에는 또 하기 싫은 이별을 가져다줄 것 같아서였고 지금은 그러던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려서였다. 그래도 늘 끝을 부를 때마다 아빠의 어설픈 바이브레이션을 놀리며 유쾌하게 마무리 되어졌었다. 오늘도 여지없는 아빠의 마무리에 이안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 해주었다.


“그 오랜 시간을 들은 노래인데 이젠 제대로 할 때도 되지 않았어? 차라리 하지 마 아빠. 그러면 깔끔하기라도 하지.”
“뭐 어때. 내가 좋으면 좋은 거지~”


차는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거의 다 왔어. 보면 깜짝 놀랄걸~ 전에 우연히 지나다 알게 된 곳인데 정말 꽃대궐 같다니까. 거기서 사진 찍어서 크게 인화할까 봐. 아빠 연구실에다 걸어놔야겠다. 예쁜 우리 딸 자랑도 하게.”
“안돼. 학생들 내 미모에 반해서 숨넘어간다.”


말끝에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자 아빠는 호탕하게 웃었다.


“너도 좀 무리다 싶은 말이었지? 안 그래?”
“무슨 소리. 아까 너무 노래를 많이 불러 그런 거야. 아빠, 이 근처 음료수 살 데 있어?”
“있죠~ 거기부터 들러야겠구나.”


어느 갈래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 코너길 한쪽, 마을 입구에 작은 가게가 있었고 다른 차량 한 대가 그 앞에 세워져 있어 여유 있게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아빠, 전화 온다. 내가 가서 사 올 테니 전화받으세요. 뭐 드실래요?”
“정교수네. 자, 아빤 너가 원하는 걸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주려는 아빠에게 자기 지갑을 들어 보인 뒤 차 문을 열고 나와 가게로 걸어갔다. 다른 차량에서 내린 듯 한 꼬마 아이가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있었고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에게서 멀찍이 서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안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커피 음료를 두 개 골라 꺼내 열심히 가게 안 먼지를 털고 있는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계산해 주세요.”


행동을 잠시 멈추고 할아버지가 다가오셨다.


“2000원이여.”


지갑에서 돈을 꺼내 드리자 거스름돈을 찾으시며 할아버지가 혼잣말인지 건네는 말씀이신지 모를 말을 하셨다.


“뭔 공사를 하는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큰 트럭이 댕겨 싸니까 먼지가 죙일 쌓이는구먼, 내 참! 이, 여기 있네 잔돈.”


할아버지가 주시는 돈을 받고 인사를 꾸벅하고 나와 차로 가려는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건가 싶은 철근을 가득 실은 큰 트럭이 굉음을 내며 아랫길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다 싶은 그 트럭을 보다 아빠를 보았다. 여전히 통화 중이었고 잠시 고개 돌린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안이 들어 보인 음료에 오케이 사인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철근을 싣고 오던 트럭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코너를 돌며 중심을 잃고 급하게 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철근들이 쏟아졌고 트럭은 나무들에 받혀서야 멈춰 섰다. 쏟아진 철근들은 조금 전까지의 모든 풍경을 덮쳐버렸다. 꼬마도 꼬마의 아빠도. 그리고 나의 아빠도.


“아빠!!!”


이안은 쏟아진 철근 더미 위를 올라 아빠에게로 급히 뛰어갔다. 불안과 공포로 가슴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운전석 차 문을 열 수 있었지만 차 안의 모습은 처참했다. 유리를 부시고 들어온 철근은 아빠의 어깨와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아빠...?”


아빠는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안아... 아빠 괜찮아. 119 신고해.”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려준 뒤 전화를 끊었고 뭐라 말하기 전에 아빠는 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아까 그 꼬마... 꼬마... 한테 가서... 살펴봐... 아빠 괜찮아. 구급차 오... 면... 인근 병원 가면 돼. 어서.”


이안은 망설여졌지만 꼬마에게로 뛰어갔다. 뛰어가면서도 발을 다시 돌려 아빠에게로 가고 싶었다. 다행히 꼬마는 몸 전부가 깔려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잃은 상태였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안은 아이의 맥을 짚어 보았다.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 있구나...

이안은 손으로 피가 나는 곳을 눌러 지혈을 하기 시작하며 아빠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아이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여주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꼬마의 아빠 역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래, 할아버지! 작은 희망으로 가게 쪽을 바라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주위를 살펴 마을 입구 쪽 등 굽은 할머니를 발견하곤 힘껏 소리쳐보았지만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꿈쩍 않으셨다. 이안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혈을 하는 손 밑으로 핏물이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져 겉옷을 벗어 그것으로 다시 눌러주었다. 이 상태에서 손을 떼면 아이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에게 갈 수 있어. 그렇지만 가면... 가면... 이안은 다시 아빠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지만 눈만큼은 아이의 상태를 주시해 살피고 있었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구급차 소리가 들렸고 이어 다급히 다가온 구급대원의 물음에 답하지도 못한 채 아이를 맡기자마자 이안은 아빠에게로 뛰어갔지만 한 구급대원이 막아섰다.

그가 뭐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막는 그를 뚫고 가려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막았고 조심스레 차에서 빼어져 나온 아빠는 들것에 실려 얼굴까지 흰 천으로 가려진 채 구급차에 실리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봄빛 반짝이던 그 날, 아이는 살았고 아빠는 엄마에게로 가버리셨다.







이안의 얼굴 위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아빠... 그때 아빠가 그 아이보다 나를 더 생각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수천 번 수만 번 들었어요... 난... 아빠가 전부인데... 아빠를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안은 떨궜던 고개를 들어 사진 속 아빠를 보며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빤 알고 있죠? 아빠가 의사로서 의무를 다하며 죽어갈 때 내가 그 꼬마한테 뭐라고 했는지를... 꼬마야 차라리... 죽어줘. 그래야 내가... 우리 아빠한테 갈 수 있어...”


굵은 눈물이 뚝뚝 비처럼 흘러 떨어졌다.

그랬던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길을 가도 되는 걸까. 눈앞에서 환자가 죽을까 봐 두려워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의사의 길을 끝까지 가도 되는 걸까.

이 커다란 모순을 담고 배웠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칼을 드는 의사가 될 수 없었다. 이안은 오래도록 그 앞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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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새살솔솔  12시간 전  
 너무 슬프네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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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댕  15일 전  
 아ㅠㅜㅜ너무 슬퍼요ㅠㅜㅜㅜ가족과 놀러왔는대 아빠가 죽엇어,,,너무 안쓰러워요ㅜㅠㅠ

 멍댕님께 댓글 로또 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보라다요  16일 전  
 너무 슬퍼 ㅠㅜㅠㅠㅠㅜㅜㅜ

 보라다요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므흣므흣^^  16일 전  
 므흣므흣^^님께서 작가님에게 10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또로록  39일 전  
 너무 슬퍼요ㅠㅠㅠ얼마나 아팠을까ㅠㅠㅠ 자신의 버팀목이 사라져서 슬플거같아요ㅠㅠㅠ

 또로록님께 댓글 로또 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희죽  42일 전  
 이안이의 감정이 진짜 잘 느껴진다..

 희죽님께 댓글 로또 1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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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융  43일 전  
 빨리 이안이에게 행복만 가득한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ㅠㅠ

 답글 0
  애정해요  44일 전  
 한번에 몰아서 보게되더라도 열심히 보고있어요
 잘 안보여도 저 좀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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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해요  44일 전  
 애정해요님께서 작가님에게 50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CARAT♡ARMY  45일 전  
 아.....ㅠㅠ
 저 상황에서 어떤 일을 했든 다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겠죠ㅜㅜ

 CARAT♡ARMY님께 댓글 로또 16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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