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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08. 우리, 사랑할 시간 - W.해늘°
08. 우리, 사랑할 시간 - W.해늘°






우리, 사랑할 시간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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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지나지 않아 차가 도착했고, 넷은 차에 올라타 숙소로 향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다. 이안은 차 유리로 빗물이 빗겨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비 오네...”


제법 내리기 시작해 나가지 않기로 하고 호텔 앞에 내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언니, 씻어야죠.”
“응, 먼저 씻어도 될까?”
“그럼요, 전 윤지네 방에 다녀올게요.”


소정이 나가고 나서도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있던 이안은 시계를 한번 보고는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찬기운 머금었던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은 벚꽃이 만개하던 때였다. 꽃구경을 시켜주겠다 나선 길에서 사고가 나 그렇게 아빠를 잃었고 한동안 봄이 되어 벚꽃이 필 때면 가슴 통증에 시달렸었다. 시간 지날수록 무뎌지기 시작해 그 통증도 사라졌는데 새삼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벚꽃을 본 것으로 무언가 나도 모르는 것들이 가슴속에서 올라왔던 걸까...


정국에게 묻진 않았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누군가 휴지를 건네주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고, 아마도 그 사람은 정국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울었던 것일까. 그 노래 듣다, 따라 부르다 급기야 울기까지... 이왕 시작하게 된 거, 즐겁고 싶었던 마음이 어떤 감정의 해방으로 연결되었던 걸까.


어쩌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벗어난 그때부터 그동안의 자신이 아니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이후의 나에 대해 궁금할 게 없는 사람들 속에서 있는 동안 편히 지내자...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우리, 사랑할 시간










베를린 공연 첫날이 지나 둘째 날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멤버들은 리허설을 하기 위해 모였다. 이안 역시 스테프들을 챙기기 위해 멤버들보다 더 빨리 공연장에 도착해 며칠 전 공연 설치를 할 때 미리 준비해 놓은 처치실로 들어갔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범위인지 알 수가 없어 대중없이 하게 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몇 번 겪다 보니 해야 할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스태프들을 위해 갖추어진 공간이었다. 아픈 사람이든 쉬고 싶은 사람이든 간에 그 목적에 맞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백스테이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간을 찾아 만들고 필요한 물품들을 한 곳에 정리해 두었다. 그렇게 마련된 공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첫 환자(?)가 방문을 했다.


“언니... 계속 속이 안 좋아요... ”
“일단 여기 앉아.”


이안은 이것저것을 물어본 뒤 기본적인 검진을 해 보았다.


“내가 내과의가 아니라 여기서 하는 진찰만으로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감히 그런 진단을 내리고 싶다.”
“뭔데요?”
“변. 비.”


첫 환자가 까르르, 소리내며 웃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퍼포먼스 팀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가보았다. 준비해둔 아이스 박스를 열어 아이스팩이 충분히 있는지 그리고 그 외 젤 파스 등이 충분히 있는지 다시 확인을 해보았다. 그리고 한차례 폭풍이 쓸고 간듯한 백스테이지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았다.


“언니, 밴드 있어요?”
“왜?”
“실수로 아이롱기에 데었어요. 작은데 쓰리네.”
“수포 생겼구나. 잠깐만.”


이안은 들고 있던 구급상자 안에서 화상 연고를 꺼내 발라주고 거즈로 감싸주었다. 일부러 터트리지 말라는 주의를 준 뒤 그 외 다른 문제들은 없는 것 같아 사람들 틈에 앉아 TV 모니터로 공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니터에 비추어지는 멤버들의 모습은 화려하고 멋졌다. 그렇게 열정적 공연의 시간들이 지나 끝에 이를 때쯤 이안의 눈길은 지민에게서 멈춰졌다.


“소정아, 나 무대 아래에 좀 갔다 올게.”
“네.”


소정은 마지막 무대에서 멤버들이 갈아입을 옷에 작은 문제가 생겨 그걸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소정을 뒤로하고 이안은 공연 관계자와 경호원들을 조심히 비켜 지나가 무대 아래 공간에서 지민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 지켜보기 시작했다. 새하얀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지민은 주변의 열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 열정적이었으나 조명 때문인지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이기까지 했다. 모니터 상으로 봤을 때 스치듯 지나간 얼굴이 좋지 않아 혹시나 아픈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자 나와 바라본 지민의 얼굴은 뚜렷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님에도 고단해 보였고... 꼭 울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군무 타임이 지나 자유롭게 무대에서 움직일 수 있을 때 지민은 아래에 있는 이안을 발견하곤 활짝 웃어주었다. 이안은 손짓으로 `괜찮냐`고 물어봐 주었고, 뜻을 알아챈 지민은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 보여주는 것으로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다. 이안은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손을 흔들어 준 뒤 멋지다는 의미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여주었다.


지민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정국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았고 오래 머물지 않고서 시선을 관객석으로 돌렸다.


마지막 무대까지 끝내고 나서 백스테이지로 갔을 때 여기저기 녹초가 되어 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민과 이안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 무대에서 둘만 나누던 신호 같은 교감들이 떠올라 정국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형을 조금 빼앗겼다는 기분인 걸까? 이거... 뭐지?


케어 팀장이 다가와 정국을 살피며 물었다.


“정국아, 발목 괜찮아?”

“괜찮아요.”


며칠 전부터 조금 아파지기 시작한 오른쪽 발목 때문에 계속 저녁마다 냉찜질과 의료기기로 관리하고 있었다.


“일단 앉아서 아이스팩 얹어놔. 염증 심해지면 안 돼.”
“네, 많이 좋아졌어요.”


케어 팀장에게 아이스팩을 받아 든 정국은 멤버들이 쉬는 공간으로 들어가 뻗어 있는 다른 멤버들 사이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참을 지민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고 결국 궁금해 다시 밖으로 나가보니 퍼포먼스 팀원들과 둘이 같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정국은 다시 들어와 차가운 콜라를 꺼내 벌컥 들이마셨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민이 카메라 감독, 콘텐츠 제작 팀원과 함께 들어왔다.


“자, 사진 찍어야 하니까 모여주세요.”


콘텐츠 팀원의 말에 멤버들은 슬로건을 들고 모여 사진을 찍고 그들끼리 남겨졌을 때 서로에게 수고했다는 말들을 하며 남준의 말을 끝으로 오늘의 공연을 마무리했다.


“오늘도 모두 수고했고, 다치지 않고 끝까지 멋지게 해 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이렇게 하자. 모두들 고생했습니다!”


그제야 멤버들은 땀으로 흠뻑 젖은 무대의상을 벗었다. 독일에서의 공연이 모두 끝났다.





“네, 삼촌. 이제 파리 도착해서 숙소 가는 중이에요.”
-구경은 좀 하고 있어?
“네, 특별한 일 없으면 시간 되는대로 하고 있어요.”
-그래, 관광도 잘하고 주어진 일도 잘하고 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놀다 돈 떨어지면 얘기하고.
“넵! 꼭 그렇게 할게요. 그 말 후회하지 않기.”
-그래그래~ 파리 구경할 거 많으니까 잘 계획해서 돌아다녀 봐. 목소리 밝아 좋다.
“네... 또 전화드릴게요.”
-오냐~


공항에서부터 거의 50여분을 달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스타일리스트 팀 외 헤어 메이크업 팀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방송 매체들과 인터뷰가 여러 개 잡혀 있다고 했다.


“배고프겠다. 빨리 컵라면이라도 먹을래?”
“아뇨 언니. 가봐야 돼요.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돼서 안될 것 같아요. 쉬고 있어요~”


물건 몇 가지를 챙기고 소정은 나가버렸고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이안은 짐을 풀어 간단히 정리한 후 다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케어 팀장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 놓았기에 마음 편히 숙소를 나섰다. 한국에서부터 프랑스를 가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고 오늘 아니면 갈 수 없을 것 같아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가고자 하는 곳은 페르 라 쉐즈 공동묘지로 다행히 숙소에서 출발해 전철을 이용한다면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아 오래 걸리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곳에 ‘작은 참새’ 라 불렸던 에디뜨 삐아프의 묘가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타 본 프랑스의 전철을 이용해 내린 역에서 조금만 걸으니 들어가는 문이 보였고 문 옆에는 지도가 있었다.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블로그에서 미리 알아보긴 했지만 막상 들어가서 걷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어 결국 다른 일행들의 가이드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간신히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 무덤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듯한 예쁜 꽃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 테지... 이안은 미처 꽃 한 송이조차 준비하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눈을 감고 그녀의 영면이 평화롭기를 바랐다.


이안이 이곳에 온 이유는 엄마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엄마는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함께했던 기억 대부분이 엄마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후에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불어를 알지도 못했던 엄마가 연습을 해서 불러주셨다고 했다. 에디뜨 피아프처럼 엄마도 작은 참새 같았다고 말씀하시던 아빠는 웃으면서도 슬픈 얼굴이었었다. 그렇게 연습해서 불러주신 노래가 ‘사랑의 찬가’.


에디뜨 피아프가 연인 마르셀 세르당이 자신을 보러 오기 위해 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이후 그리움의 고통을 담아 부른 노래였다고 했다. 나중에 커서야 알게 되었던 것들이 있었는데 가끔 엄마가 즐겨 듣던 노래가 그녀의 노래였다는 것, 그 곡의 가사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느 날 노래를 들으며 하염없이 우시던 아빠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었을 테지...


모처럼 아빠가 일찍 퇴근하시던 날,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가던 날, 음주 운전 차량이 우리를 덮쳤고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나를 지켜내셨다고 했다. 엄마 손을 잡고 깡총거리며 뛰어가던 것과 사고가 나던 순간에 엄마 품속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병원에서 아빠 손에 이끌려 누워 있는 엄마에게 ‘안녕 엄마.’라며 슬픈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빠는 어쩌면 돌아가실 때 좋으셨을까?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될 테니 빨리 가고 싶으셨을까? 그래도 내가 남겨져 있는데... 가시는 길에 뒤돌아 보셨을까? 당신은 의사로서 의무를 다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다시 만났을지 몰라도 남겨진 나는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이안은 자리에 서서 넘어오는 울음을 참았다. 울고 싶지 않았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고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이제 아무 문제도 없는 하늘 속에서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사랑의 찬가- 중










우리, 사랑할 시간










방송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저녁을 모여 먹을까 말까 하다 결국 각자 해결하는 걸로 하고 헤어져 방으로 돌아온 정국은 자신의 방에서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콩코드 광장에 관람차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는데 영국에서 타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곳 파리에서 타는 걸로 대신하고 싶어 져 이안에게 같이 타러 가자 묻는 것에 대해 go and stop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한가 고민하다 하지 말아야 되는 걸 고민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 같아 정국은 마음먹고 톡이 아닌 전화를 걸었다.


-어, 정국아. 무슨 일 있니?
“누나, 아까 이야기 들었는데...”
-응, 뭘?
“콩코드 광장에 관람차 있대요. 가서 타보고 싶어서요. 같이 가실래요?”


전화 건너 짧은 순간의 침묵이 조금 긴장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래, 가자. 근데 너 나가도 돼?
“네, 택시 타고 가요.”


정국은 이안과 만날 시간을 정하고 끊었다. 한껏 신나져 신고 나갈 신발을 미리 신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울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만졌다. 시간에 이르러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도록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자마자 재빨리 비상계단 쪽으로 내려가 회사 사람들이 머물지 않는 몇 층 아래로 내려가서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갔다. 기다리며 생각하자니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지만 알게 될 때 알게 되더라도 혹시라도 마주쳐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 싫었다.





“정국아”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이안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밥은 먹었어?”

“누난 꼭 밥 먹었냐 물어보네요.”
“한국식 인사지. 그리고 난 못 먹어서 배고프거든.”

“저도 아직 먹진 않았어요. 제가 찾아봤는데 케밥 맛있대요. 그거 먹을까요?”
“그럴까? 가자.”



호텔을 나서 미리 부른 택시를 타고 콩코드 광장까지 가는 길에 멋진 파리의 야경을 보며 감탄을 했다. 같은 유럽이면서도 파리는 파리였다.


택시에서 내려 곧장 콩코드 광장에 있는 관람차로 향해 티켓을 끊고 알려주는 대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누난 오늘 다른데 다녀오셨어요?”
“응, 페르 라 쉐즈라는 공동묘지에.”
“공동묘지여? 무덤?”
“유명한 사람들이 묻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가.”

“그럼 그냥 유명한 사람들 무덤 보러 간 거예요?”
“보고 싶은 무덤이 있었거든. 에디뜨 피아프. 프랑스의 유명한 가수였어.”


이안은 짧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사랑의 찬가’. 제목은 몰라도 들어보면 알걸? 워낙 유명하니까.”


드디어 차례가 되어 둘은 관람차 안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가방을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음악 들어도 돼?”
“그럼요.”
“아까 말한 그 노래야.”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움직이는 관람차 안에서 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멀리 에펠탑이 보였는데 마침 정각이 되어 예쁘게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둘은 흔한 감탄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음악만을 들으며 그렇게 마주 앉아 야경만을 바라보았다. 영국 때와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아도 어색할 거 없는 이 시간 속에서 정국은 마음이 편안함을 느꼈다. 월드 스타로서의 자신과 지금 이 시간 속의 자신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일반적인 삶의 궤도였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 멋진 이 파리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을까? 지금의 삶은 축복이고 영광이고 행복이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그것대로 고민 있는 청춘이었겠지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현재의 불안에 대한 거울 같았다. 불안... 정국은 알고 있었다. 그 불안의 원인이 자신에 대한 자신감 부족이라는 걸. 시간이 갈수록 정말 내가 갖고 있는 가치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맞는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함, 불신.


생각이 이렇게 뻗어갔어도 당장의 지금은 편안했다. 맞은편의 이안을 바라보았다. 밖을 보고 있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짧은 꿈을 꾼듯한 이 시간이 끝나가고 있을 때 정국을 마주 바라본 이안이 말했다.


“배고프다.”





관람차에서 내려 정국이 알아봤다는 케밥집으로 찾아갔다. 유명하다고 한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막상 받아서 한 입 먹어본 둘은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 맛있는걸?”


꽤 많은 양의 케밥이었지만 이야기를 곁들여 먹다 보니 어느새 다 먹게 되었고 가게에서 나와 센강을 따라 잠시 걷기로 했다.



“누나는 의사 말고 되고 싶은 것 있었어요?”
“글쎄... 기억이 안 난다. 있었을 텐데.”

“그럼 언제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아빠한테 정말 훌륭한 딸이 되어드리고 싶었거든.”


정국은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의사가 되기 전에 아빠도 돌아가셨지만...”


이안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뭐하러 이 나이 어린 친구에게 연호에게 조차 해보지 않은 투정 섞인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월드 스타,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외국이라는 환경의 조건을 핑계 삼아 답답한 마음 한 자락을 펴보는 것일까. 갑자기 나온 이야기에 정국이 놀랐을 듯 해 이안은 웃어 보였다.


“심각해 지지마. 그냥 그렇다고... 그냥 그런 건데...”


가로등 불이 비친 이안의 얼굴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안은 황급히 강 쪽으로 몸을 돌렸다. 멈춰야 하는데 멈춰지질 않는 눈물과 차가운 강바람에 얼굴도 마음도 시려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말없이 이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정국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울음소리를 속으로 삭히고 있는 이안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늦게 잠들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눈이 떠졌다. 정국은 누운 채로 어제의 일을 다시 한번 복기하듯 떠올려 보았다.


강가에서의 일까지 영화처럼 이어지다 마치 다큐를 보듯 현실적으로 돌아온 그녀가 ‘이젠 가자’라고 했을 때부터 오히려 정국 자신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킨 마음일 거란 생각에 그 이상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둘은 또 말없이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일상적 인사를 하고 헤어졌었다. 방으로 돌아온 정국은 의자에 앉아 아까의 일이 영상보다 촉감으로 더 크게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팔 안에 잠기는 떨리던 어깨, 볼에 닿던 머리카락... 그리고 추측조차 하기도 어려운 슬픔이 느껴지던 그 눈물.


현장으로 나가면 마주치게 될 텐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평소와 똑같이 하는 것이 정답일 테지만 그보다는 이안이 자신에게 어떻게 할지가 궁금했다. 그녀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할 것이란 예상이 되면서도 다른 기대감 같은 것이 있었다.


더디게 가는 것만 같은 시간을 확인하다 무엇이든 집중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씻기로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음악을 틀고 욕실로 향했다.





멤버들끼리 점심을 먹기로 해 석진의 방에 다들 모였다.



“난 별로 배 안 고프니까 간단하게만 먹을래.”


지민의 말에 석진은 핀잔하듯 농담하듯 말했다.



“배도 안 고프면서 왜 왔어.”

“에이... 멤버들 모인다니까 왔죠 형님~”


남준이 걱정이 담긴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좀 먹어둬야지. 잘 좀 먹어 넌.”

“아니 아니, 아까 오전 중에 이안 누나 만나서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브런치 했어요. 독일에서도 그랬는데 괜찮더라구요. 내일은 우리끼리 가볼래요?”


아침부터 지민을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는 이안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정국이 되물었다.



“이안 누나랑 먹었다구요?”

“응, 누나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아침에 연락해서 만나 먹었지. 독일에서 먹었던 거랑 또 맛이 다르더라구.”


7명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밥을 먹는 소란스러움 속에서 정국은 말없이 음식만을 먹었다. 조용한 정국이 이상하다 느꼈는지 지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디 안 좋아?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아뇨... 조금 피곤해서. 어제 늦게 자가지구...”
“일찍 일찍 좀 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 사랑할 시간










공연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스텝들은 와서 준비하고 있었고 정국은 이리저리 둘러보다 공연장 무대 아래에서 백댄서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안을 발견했다.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는 여느 때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차례로 무대로 올라서는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던 이안은 정국이 무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는데 이후론 보이질 않았다. 쉬는 시간에 뒤쪽으로 가볼까 싶었지만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내내 보이지 않다가 다시 안무를 맞춰보고 있는 와중에 무대 아래쪽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고 자꾸 생각이 그리로 향해 무대에 집중이 되질 않아 동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스텝이 꼬이며 발목이 순간 틀어졌는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음악은 멈춰졌고 지민이 다가왔다.


“자, 집중하고, 다시 해보자.”


지민이 정국을 다독이듯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정국은 정신 차리려는 듯 양손으로 볼을 두드린 후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려 했지만 발목의 통증때문에 버텨야 하는 자세에서 다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잘못된 자세에서 문제가 시작된 것 같았지만 해내야겠다는 의욕이 더 앞서 지민을 안아 들고 움직여야 하는 안무에서 무리하게 움직이다 결국 무릎이 꺾이며 지민을 안은 채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큰 소리가 울렸고 멤버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놀라 두 사람에게 급히 다가왔다. 케어 팀장이 정국에게 다가와 발목을 살펴보며 이것저것을 물었지만 정국의 눈은 지민에게 달려온 이안에게 향해 있었다.


“지민아, 괜찮아?”

“괜찮아요. 소리만 컸지 뭐. 정국이가 잡고 있어서 대미지는 별로 없었어요. 그보단 정국이가 발목이 다시 아파진 거 같은데.”
“야, 소리만으로 다들 놀랐어. 진짜 괜찮은 거야?”


호석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지민에게 묻고 있었다.


“진짜 진짜 괜찮아요 형.”


그때서야 이안은 정국 쪽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다른 멤버들이 모여 있었고 케어 팀장이 살펴보고 있는데 정국의 표정은 별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이안은 일어서 정국 쪽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정국이 괜찮아요?”
“전부터 염좌가 있었는데 그게 좀 안 좋아졌나 봐요. 한번 봐줄래요?”


케어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퍼포먼스 디렉터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나, 정국이 발목이 부어 있어요.”


남준의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에 이안은 대꾸 없이 바지가 걷어져 있는 정국의 발목을 살펴보았다. 말대로 부어 있었고 발목 주변이 조금 푸르스름해진 것이 보였다. 일단 구급상자에서 응급용 부목을 꺼내 조심스럽게 받쳐 압박붕대로 고정시킨 후 발목용 아이싱 팩으로 한번 더 감싸주었다. 정국은 내내 이안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안은 일어서 다가와 있는 케어 팀장과 퍼포먼스 디렉터에게 병원을 가서 사진을 찍고 확실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선주 이사님한테 전화해. 상황 말씀드리고 병원 가자.”


케어 팀원들의 부축을 받아 정국은 병원을 가기 위해 무대 밖으로 사라졌고 남은 멤버들은 이안에게 걱정스러워 물었다.


“누나, 저 정도면 심각한 거예요?”
“보이는 걸로 봐서는 인대 손상이 있는 것 같아. 병원서 사진을 찍어보고 초음파로 확인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한동안 움직이면 안 될 거야.”


근심스러움이 멤버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퍼포먼스 측면으로도 수정이 불가피했기에 정국 없이 안무를 다시 정돈해야 했지만 그런 면에서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큰 혼란은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일이 끝나고 발에 깁스를 한 채로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와 멤버들이 리허설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정국은 복잡하게 화가 치솟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속상했다를 반복하며 끓는 물 뚜껑처럼 속이 들썩거렸다. 한 부분의 리허설이 끝난 후 멤버들이 케어 팀장으로부터 정국의 병원 검사 결과를 듣고 다가와 한 마디씩 해주었다.


“최소 2주간은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며. 공연 생각하면 속상하겠지만 어쨌든 잘 낫는 것에 집중하자. 알았지?”

“죄송해요 형... 유럽 마지막 공연인데 일이 이렇게 돼서...”
“앞으로 많은 공연이 남아 있잖아. 팬분들께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해해주실 거고.”
"이정도라 다행이야. 난 아까 그 소리에 정말 크게 다치는 줄 알았어."


태형이 고개 숙인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멤버들은 곧 다시 리허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돌아갔고 정국은 앉아 그 모습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민과 이안이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안이 지민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웃는 걸 보니 자신 안에서 끓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질투였다. 그 감정을 질투라 인정한 지금도 정국은 자신이 이해되질 않았다. 도대체 왜 본지 두 달도 안된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지 어이없고 화가 났다. 공연을 못하게 되어 속상한 상황에서 눈앞의 저 광경에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화가 났다. 자신을 보러 비싼 티켓을 사서 오는, 자주 오지도 못해 자주 보지도 못하는 팬들에게 보여줘야 할 공연인데 다른 것에 신경 쓰다 일이 이렇게 된 것도 화가 났다. 다른 건 몰라도 무대만큼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한다는 자긍심에도 금이 가버려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다음날 정국은 무대 한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공연을 함께 했다. 미안함을 담은 인사말에 팬들은 괜찮다는 듯 함성으로 화답해주었다. 정국은 고개를 들어 그런 팬들을 끝에서 끝까지 둘러보았다. 미안하고 고마워 마음이 뭉클해져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그래, 이쯤에서 시작되려 했던 그 마음은 지워버리자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이 마음도 걷어내자 생각했다. 현재 할 수 있는, 내 생애 최고의 이 일을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하자고... 정국은 반짝 거리는 객석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며 팬들과 함께 호흡했다.












오늘 분량 많죠?ㅋㅋㅋㅋㅋㅠ 드디어 뭔가 진행 좀 되는 것 같아서 맘 놓여요ㅋㅋㅠ 글 좀 일찍 올리려고 했는데 매번 편집 너무 길어져서 이 시간대에야 일케 올리게 되더라고요. 늦은 시간이니, 푹 주무시고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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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벨라와꾹꾹이♡  15일 전  
 분량 최고여유!

 답글 0
  또로록  40일 전  
 헉 질투인걸 알았네요!! 남주는 과연..!!

 또로록님께 댓글 로또 1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삥빵삔빵  57일 전  
 ㅈㅈㅎ

 답글 0
  수수까아저씨  63일 전  
 작가님 글은 어떻게 다 예쁜거에여ㅠ

 답글 1
  샛별-★  85일 전  
 알림이 오늘따라 배신을 했어요..왜..!오늘..!배신을..!

 샛별-★님께 댓글 로또 8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lucy8  85일 전  
 lucy8님께서 작가님에게 55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2
  lucy8  85일 전  
 분량 짱이양!!역시 언냐♥♥
 남주가 누군지 넘넘 알고 싶오

 답글 1
  『폐뮤늉』슙슙  85일 전  
 작가님 분량 진짜ㅠ 감동이여ㅠㅠ 아니 왤케 잘쓰세요오ㅠㅠ

 답글 1
  감자한  85일 전  
 정국아 그건 이안을 향한 트루럽ㅎㅎ 해늘님 근데 분량ㅠㅠ 미친거 아닙니까!!ㅠㅠㅠ

 답글 1
  옐율  85일 전  
 자까님 분량 모에요ㅠ 감동ㅜㅜ 글 잘 읽었습니당!

 옐율님께 댓글 로또 7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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