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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김남준] 인애를 삼킨 해병下 - W.단 멸
[김남준] 인애를 삼킨 해병下 - W.단 멸







※본 글은 [김남준] 인애를 삼킨 해병上 과 이어집니다. 상편을 읽지 않으시지 않으신 분들은, 상편을 읽고 하편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검색창 단 멸, 부탁드립니다. )








A mAriNe wHo SwaLloWed loVe of lOve
인애를 삼킨 해병下



Trigger warning - 이별에 관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作ㅣ단멸





8

자신이 정녕 미친 거다, 싶은 여주는 남준과 정국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오가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군대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며,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해놓고선. 3살이나 어린 남자랑 사랑 놀음이라 하고 앉아있으니, 여주도 자신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국은 자주 여주에게 스킨십을 요구하는 것이, 여주를 좋아하는 눈치인데. 여주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남준을 생각하면 갈팡질팡하면 안 되는 거지만 말이다.


여주는 결국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도록 사랑했는데, 고작 몇 번 안 만난 사람한테 흔들릴 수 있는 감정이. 아직 자신밖에 모르는 삭발해 있는 그놈이.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감정선을 추스를 수 있을까. 남준은 곧 휴가로 이곳에 내려온다. 정국은 여전히 여주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남준과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정국에게는 친한 친구라고 말해서 상관이 없지만, 남준은 정국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도중에 정국에게 전화라도 걸려왔다간, 여주는 그 일로 남준과 서먹해질 것이다.


남준이 속 좁은 사람은 아니라서, 그 순간만큼은 대충 아는 동생이라고 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여주의 감정이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로 기울고 있는가. 몇 년의 연애, 며칠의 썸. 남들에게 배우지 않았던 사랑의 결정법. 난 김남준을 사랑하고, 김남준이 없는 동안 마음이 기운 사람은 전정국이었다. 김남준은 언제나 나를 아껴주던 사람이었고, 전정국은 그리 오래 만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힘들 때면 껴안아 주는 사람이다.


남준을 지우기가 무섭고, 정국과의 인연을 놓기가 싫다. 남준은 한없이 따뜻하고, 정국은 한없이 애틋하다. 남준에게로 기울어야 하는 마음이, 정국에게로 기울고 있음을. 여주는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는 듯했다.





9

윤기는 왠지 남준보다 더 떨려 하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내려가는 사람은 남준인데, 옆에 있는 윤기가 더 야단법석이었다. 윤기는 휴가 마지막 날에 연락하겠다며, 그전까지는 둘만의 시간을 잘 보내라는 둥, 혹여 애인 옆에 다른 남자가 있어도 침착하게 행동하는 둥. 남준의 등 뒤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ㅡ휴가 마지막 날에 연락할게요. 형은 바로 부모님 댁 내려갈 거죠?

ㅡ아니, 며칠은 좀... 있다가 내려가려고.

ㅡ에이 형,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 보지요?

ㅡ허 참. 있으면 어쩔래.


윤기는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 버렸다. 그런 윤기의 반응에 저 형도 여자 친구 만나러 가는 거구나, 싶었다. 늘 자신의 얘기만 듣고, 옛 애인들 얘기만 해주었지. 실상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는 말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남준이 물어본 적도 없었다. 남준은 윤기에게 한 방 속았구나 싶었다.


윤기와, 남준은 거기서 그렇게 헤어졌다. 헤어졌다고 하니 어감이 좋지는 않지만, 헤어진 건 맞았다. 헤어졌다.





10

남준은 내려가기 전쯤, 내려가려고 할 때. 여주에게 이제 내려간다고 문자를 넣었다. 여주는 남준이 전화를 걸지 않고, 문자를 보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텍스트로는 그 누구보다도 남준을 목 빠지게 기다린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준에게 미안했다. 휴가 나와서 자신과 여행 갈 거라고 들떠있는 남준이 계속 눈에 밟혔다. 아직 남준을 사랑하고 있는데, 아니 사랑하는데. 여주에겐 정국의 체취가 묻어나 있었다.



정국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오늘 시간 돼요? 여주는 저번에 말한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안 된다고 했다. 정국은 여주 얼굴이 보고 싶다며, 밤에 나올 수 있냐고 물었다. 여주는 시간 되면 나오겠다고 정국에게 답했다. 정국은 조금 섭섭한 눈치였다.


ㅡ친한 친구라면서, 밤이라도 같이 보내게요?

ㅡ밤 까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뭐. 되도록 연락하지 마.

ㅡ알겠어요, 밤에 봐요.


짓궃은 대답이었다. 남준과 계속 같이 있을 터인데, 밤에 몰래 정국을 만나러 나올 수 있을까. 아직 정리되지 않은 관계들 속에 여주는 파묻혀 있었다. 여주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남준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려 후회와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남준을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다른 남자를 사랑해 버렸다.



혹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남준이 내가 정국을 만나는 것을 보기라도 한다면. 여태까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는 우리는 어떻게 갈라지게 될까. 2년 동안 서로만을 바라보았던 우리. 그날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나는 네 기대를 저버렸고. 오랜 시간 동안의 연애가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너 휴가 내려와서 우리 엄청 오랜만에 같이 하루를 보내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심란한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남준아.


남준아, 내가 이렇게 나쁜 X 일 줄은 나도 몰랐어. 아, 근데 전정국 그놈이 적당히 예뻐야 말이지. 두 명 다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아. 그래서 널 끝내고 싶어. 너 군대에 있는 동안 나 속앓이 좀 했다. 보고 싶어서. 그 대가로. 우리 마지막 사랑 놀음이나 하자.





11



ㅡ임여주~!


남준이 여주를 세게 끌어안았다. 까까머리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지만, 잘생기기는 여전히 잘생긴 남준이었다. 여주는 남준을 보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준은 이 기쁜 날 외우느냐며 여주를 자신의 품에 넣고는 등을 토닥여줬다. 여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향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난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지? 남준을 알 길이 없는 여주의 속사정. 여주는 남준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미안해서 울고 있는 것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ㅡ남준... 아.

ㅡ나 없는 사이에 더 예뻐졌네... 누가 채갈라, 내 옆에만 있어.

ㅡ응... 그럴게. 우리 오늘 어... 디가?

ㅡ근사한 곳.


여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남준은 여주에게 근사한 곳으로 간다고 답했다. 정국은 남준이 전화를 했을 때, 자신이랑도 같이 가자며. 갈 곳을 근사한데, 라고 칭했다. 어쩜 이리도 잘 들어맞을까. 여주는 이 순간만큼은 남준에게 집중하려 해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정국의 얼굴을 가슴 깊은 곳에 집어넣기가 힘들었다. 남준이 들어차 있어야 하는 공간을, 모조리 정국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준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따뜻했다. 안전띠를 채워주는 것부터 시작해, 여주의 취향을 잘 알고 있어 여주가 자주 마시는 커피를 건네는 것 등등. 여주에겐 한없이 다정한 남준이었다. 여주는 눈물샘이 고장 났나 싶을 정도로 계속 새어 나오는 눈물을 남준에게 감추기 위해,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었다.


ㅡ후덥지근하긴 하지만, 날씨 좋네. 오늘.

ㅡ그러게, 너 만나러 내려오는 날이라고, 하늘도 맑네.

ㅡ남준아, 훈련은 괜찮아? 안 힘들어?

ㅡ음... 뭐. 힘들긴 한데, 버텨야지 뭐. 우리 임여주씨 지키려면.

ㅡ다, 다행... 이네.


여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떠돌았고. 남준은 여전히 해맑았다. 정국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오늘은 되도록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연락하면 어쩌지. 여주의 머릿속엔 걱정거리들만 가득했다. 죄라도 지은 기분이라서. 아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큰 죄를 지은 거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았다. 오랜만에 직접 마주한 남준인데, 여주는 가슴이 아파서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ㅡ오랜만에 봤는데, 창밖 그만 보고 나 좀 봐. 나도 예쁜 임여주 얼굴 보고 싶다.

ㅡ운전하는데 집중하라고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거야. 사고 나면 어쩔래. 여친 얼굴 보다가.

ㅡ허 참, 네네 운전하겠습니다, 애인님.

ㅡ오늘 재밌게 놀자, 나 와인 마시고 싶어.


마지막 만남, 마지막 우리 둘의 사랑 만큼은
애틋하고 진득하게 보내자.



ㅡ너 술 잘 못 마시잖아. 아닌가, 나 없는 사이에 주량이 좀 느셨나 봐요? 임여주씨?


맨정신으로 널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술에 취해야 눈이라도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아서.


ㅡ응, 늘었어. 나보다 먼저 얼굴 빨개지지나 마.



조금만, 조금만 잔인해질게. 네가 내 눈앞에 있는데도 이렇게 흔들리는 거 보면. 자꾸만 걔 생각이 나는 거 보면. 난 여기까진 거 같아. 조금만 잔인해질게. 미안해. 남준아.




12

여주는 주량이 세지지 않았다. 그대로였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밤이 되었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여주는 와인을 계속해서 들이켰고, 남준도 꽤 많이 마신 거 같았다. 여주는 눈앞이 자꾸 흐려졌지만, 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밤에 보자는 정국의 말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정국이 연락할까 과연. 여주는 계속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남준은 여전히 여주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고, 여주는 자기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느냐며 남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정녕 곧 떠나보낼 연인을 대하는 태도가 맞는지 자신에게 의심이 갔다.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 같지는 않다고 가슴에서 계속 핀잔을 준다. 조금만 더 있다가 정리해볼게요. 여주는 자신의 물음에 답했다.


ㅡ누나, 밤인데. 우리 볼까요?

ㅡ응...? 지금...?

ㅡ네, 보고 싶어서요. 안 돼요?

ㅡ나갈... 게. 언제 왔... 데, 이 근처는.

ㅡ누나, 보고 싶어서.


결국,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남준은 여주의 바로 눈앞에 버젓이 앉아있고. 여주는 정국을 만나러 나갈 것이다. 들킬 일 들키자, 하는 마음으로 여주는 남준에게 잠시 좀 나갔다 오겠다고 답했다. 바람 쐬러 가는 거면, 같이 가자는 남준의 손을 뿌리치고 말이다. 여주는 끝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남준은 웃으며 괜찮아, 다녀와.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이 여주에게 얼마나 살인적으로 다가왔는지 남준을 모를 것이다. 가슴이 저릿하면서 살을 파고드는 기분을.



정국은 헐렁한 회색 반소매 티에, 격식 없는 정장으로 보이는 바지를 입곤 혼자 서있었다. 여주는 차마 정국의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고 정국의 뒤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정국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ㅡ왜 웃어?

ㅡ누나 목소리 밤에 들으니까, 더 좋아서.

ㅡ무슨... 소리야. 또, 똑같아.

ㅡ오늘 재밌게 잘 보냈어요?

ㅡ응, 잘 보냈어.

ㅡ다음에 나랑도 가요, 알겠죠?


응, 간다고 저번에 그랬잖아. 왠지 모를 온기가 여주를 감싸고 있었다. 크게 꾸미지 않은 정국의 모습.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정국은 조금 더 성숙해 보였다. 처음으로 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달까. 밤은 가로등에 들끓는 하루살이들조차 감성에 젖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밤이라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형체를 보지 못했다.


ㅡ엇, 안녕하세요. 같이 여행 오셨다는...



ㅡ친한 친구분.





13

남준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여주와 정국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한 애인이,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와 딱 붙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남준 선에선 꼭지가 돌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남준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 간신히 정신을 잡고 말을 꺼냈다. 적지 않아 큰 충격이었는지, 남준은 입술을 달달 떨었다.


ㅡ임여주.

ㅡ남준아, 내가 다 설명ㅇ...

ㅡ따라와.

ㅡ무슨... 일이시죠? 얘기하실 거면.

ㅡ키스. 여기서 할까요?

ㅡ.........키스는 친한 친구분 말고 애인 될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ㅡ그래서 제가 이 누나한테 키스하려고요.





14

ㅡ정국아, 미안... 잠시만. 기다려줘.


남준은 여주 팔목을 붙잡고 어딘가로 향했다. 여주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고, 남준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묻어나 있었다. 남준은 고개를 크게 한 번 돌리더니 입을 뗀다. 여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ㅡ임여주.

ㅡ미안해.

ㅡ고개 들어.

ㅡ.........

ㅡ저 남자는 누구야?

ㅡ전정국... 20살...

ㅡ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남준의 말에 여주는 경직되었고, 남준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화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주는 그 순간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했다. 진짜 아무 말도 없이, 눈으로만 울었다.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ㅡ나 없... 는 동안. 나 군대... 가 있는 동안 만난 거야?

ㅡ아직... 연인도 아니야. 남준아 네가 생각하는.

ㅡ왜 그러면 저놈이 너한테 키스하겠다는 말을 운운해.

ㅡ그건......

ㅡ솔직히 말해줘. 임여주. 난 더는 변명 듣고 싶지 않아.


여주는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만 했다. 말을 이어나가는 도중에도 눈물은 흘러내렸고, 남준은 그런 여주를 보며 손을 움직이다가도 이내 내려버리곤 했다. 여주는 이미 생각한 결말이었는데, 이렇게 아플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감정에 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여주는 다 털어놓자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예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ㅡ너 없는 동안 얘 좀 사랑한 거 같아.

ㅡ솔직히 그동안 많이 힘들었는데.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거, 넌 잘 알잖아.

ㅡ미안. 애정이 고팠어. 이렇게 무더운 날에도 뜨거운 애정이 고팠어.

ㅡ너 다시 군대 나와도, 우리 생활은 여전할 거고. 난 종종 굶거나,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워. 엄마랑 아빠는 생활비 언제쯤이면 보내줄 수 있냐고 계속 물어보시는데 내 생활은.

ㅡ하... 그만. 그만 말해, 임여주.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들은 여주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남준의 심장에는 못이 박히고, 몇 년간의 사랑이. 고작 이렇게 허물어진다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고작 내가 군대에 갔다는 사실로. 내가 해병대에 간 사실만으로.

남준은 여주보다 더 애처로운 얼굴로 여주의 시선 위에서 무얼 말하려는 눈치였다. 한참 고민하나 싶더니 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ㅡ여주야. 그래도 우리 추억 많잖아.

ㅡ나부터... 나부터 사랑해주면 안 될까.

ㅡ...... 뭐...?

ㅡ나 휴가 끝나는 날까지는 나만 사랑해 달라고.

ㅡ나한테 화내면서, 막 욕해야... 하는 게 정상아냐...!? 넌... 어떻게 끝까지... 잘... 해주... 는... 거야. 사람... 이 어떻게... 그... 래?



ㅡ난 인애를 삼킬 줄 아는 해병이거든.



김남준의 마지막 입술은 한여름의 더위보다 뜨거웠고, 얼얼한 심장은 심해 속에 빠져가는 것만 같았다.





15

남준의 휴가가 끝이 났다. 여주는 휴가가 끝나는 날까지 남준 만을 사랑했다. 정국과 연락을 일절 하지 않았으며, 연애 초창기 때로 돌아간 듯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모조리 다 잊고, 여주와 남준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둘의 감정은 주체가 안 되고, 하루하루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남준은 결국 떠나야만 했다.


군대에 가는 남자친구와 다시 헤어지는 순간, 그리고 스물한 살부터 시작된 길면 긴. 짧으면 짧은 연애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여주와 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이젠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눈치였다. 둘은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한여름의 태양은 연인의 사랑보다 뜨겁지 않다. 헤어지는 순간이 따스할 줄은 몰랐지만, 둘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남기를 바라는 온전한 마음으로. 남준과 여주는 작별을 고했다. 바람은 부는데, 그 무엇도 쓸려가지 않았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네 형체가 떠오를 때면 난 그 순간만큼은 너를 사랑하려고. 괜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부정해봤자 아파지는 건 나일 테니까. 긴긴밤을 보낼 때마다 나는 너를 게워낼 거야. 나는 아픈 게 맞으니까. 전정국이라는 놈, 잘생기기는 진짜 잘생겼더라. 몸도 다부진 거 같고 네 곁에 있으니까 행복해 보였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만. 속이 얽매이는 느낌을, 그제야 제대로 알 것만 같았어.


내가 너를 그냥 떠나보내는 이유도, 너에게 그다지 많은 화를 내지 않은 것도. 난 그저 너를 아직 사랑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참 부질없지? 내가 없는 긴 밤을 네가 혼자 보내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해. 어쩌다 만난 사이라도 애틋해지는 게 현실이야. 내 품보다 그놈 품이 더 따뜻할 거고. 가슴이 저리다.

다시 돌아와 달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난 여름과 인애를 삼켜. 앞으론 정국이랑 예쁜 사랑 하면 좋겠다. 사랑해.





16

ㅡ형, 난 이제 올라가요.

ㅡ벌... 써? 아니지 벌써는 아닌가.

ㅡ형, 휴가 잘 보냈어요?

ㅡ당연하지, 잘 보냈어. 무슨 일 없었지? 애인이랑 잘 보냈고?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남준은 감정을 추스르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는 않았다. 윤기는 아무 말 없이 남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준은 해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ㅡ형.

ㅡ어, 왜.

ㅡ나 헤어졌어요.

ㅡㅁ, 뭐...?

ㅡ헤어졌어요. 여주 옆엔 이제 저 없고. 다른 사람 있다고요.

ㅡ존나 눈물 나네요. 저도 이제 형 옆에서, 옛 애인 얘기나 늘어놔야겠어요. 사람 인생이라는 거, 참 웃기죠?





17

정국은 무덤덤했다. 여주에게 남친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다지 큰 반응은 없었다. 그저 담담한 척하는 것인지, 진짜 괜찮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주가 느끼는 시선에서는 그랬다.

정국은 눈물범벅이 된 여주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눈물을 삼키는 여주를 꼭 껴안고는 여주가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다. 여주는 생각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몰려오는 죄책감에 정국의 가슴팍을 쳐댔다. 남준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순간인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여주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남준과 며칠을 보내고 나서, 그러니까 남준의 바람대로 뜨거운 사랑을 끝내고서야 제 눈앞에는 이제 정국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둘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서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남준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버렸다. 끝이었다. 남준과 함께했던 순간이, 자신이 사랑해버린 정국을 잃지 못하느라 모두 끝나버린 것이었다. 남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여주는 미동도 없이 남준이 떠난 도로 쪽을 바라보았다. 남준은 떠났다.

여주는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필승을 건넸다. 인애를 삼켜준 해병. 남준을 위한 마지막 애도이자. 사랑이었다.





18

몇 개월이 지났다. 여주는 어김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냈고, 생활비는 언제 보내주느냐는 부모님의 문자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칠 대로 지쳐갈 때면, 정국에게 연락해 잠깐 목소리를 듣곤 했다.

얼마 전 여주는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어느 한 그림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남준이었다. 남준이 머리를 짧게 깎고 자신에게 보낸 사진을 그리고 있었던 몇 개월 전쯤. 문득 생각이 난 남준의 얼굴이 여주의 눈동자를 그을리게 만든다. 여주는 그 그림을 한참 들고 있다가, 결국 다시 연필을 잡는다. 아직 하관이 다 그려지지 않았는데, 여주는 눈부분을 지우더니 철모를 그리기 시작했다.


ㅡ이래야 군인 같지.

ㅡ안 그래? 김남준.


그래, 이래야 군인 갖지. 김남준은 군인이니까. 해병이니까. 다시 그림을 구석에 처박는다. 다음에 생각나면 더 그려줄게. 그때까지는 내 기억 속에서 잠시만 잊혀 주라. 여주는 그림을 뒤로했다.





ㅡ정국아, 잠시 시간 돼?

ㅡ어... 30분만 있다가요!

ㅡ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ㅡ누나 오늘따라 목소리 더 좋다, 빨리 보고 싶은걸.

ㅡ빨리 오기나 해. 보고 싶다.





 





ㅡ날씨 진짜 덥지, 이 날씨에 훈련하려면... 너도 진짜 고생 많겠다.

ㅡ누나 걱정이나 하세요, 내 걱정하지 말고.

ㅡ그나저나, 정국아. 나 물어볼 거 있는데...

ㅡ응?

ㅡ너... 도 군대... 가지?

ㅡ아니, 안 가.

ㅡ그게... 무슨... 소리야?

ㅡ나 세계 선수권대회 우승하려고. 꼭.


정국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꼭 우승하고야 말겠다, 하는 눈빛이었다. 몇 개월 전, 군대에 있는 남준이 여주와 갈기갈기 찢어지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적지 않아 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정국은 여주와 헤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쩌다 찾아온, 어느새 곁에 없어선 안 되는.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주는 정국이라서,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이 정국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짐 앞에서 사람은 관대해질 수 없음을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맹목적인 사랑은 보고픔에 헐떡이고, 지지리도 졸렬한 이별 내음은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여름 앞에 서 있는다.


애정을 삼킨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냐고 나는 물었다. 인애를 삼킬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어진 사랑을 한다는 말 뒤로, 애정을 삼키고 있었음을 나는 몰랐고. 그렇게 우리는 결별했다. 분명 분연을 낼 사람은 그였는데, 왜 내가 울었을까. 울 사람은 그였는데, 왜 나에게 윽박지르지 않았지.

해병은 사랑 앞에 관대할 수 있다. 해병이라 칭하는 그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름 따위에 묻혀버린 그림쟁이였을 뿐이었다.







그곳도 많이 덥나요?
무지 더운 내 여름밤은
그대의 숨결에도 잠들지 못하고 있어요


여름을 삼킨 나는
그리고 인애를 삼킨 나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그대는 예쁜 사랑해서 다행이네요


○○○


해병은 정말이지 힘들어 죽겠어요
그래도 제가 여기서 나가는 날까지
저는 아직 청춘이니
저도 예쁜 사랑 하겠습니다

나의 청춘
내 여름을 모조리 집어삼키던
나의 달콤한 아가페는
여름 속에 잠듭니다


○○○


나는 이제 사랑하지 마요
사실 조금만 더 사랑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는 이제 인애할게요
그대는 예쁜 사랑해요
내가 모조리 삼켜줄 테니




어……
제발 저에게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

본 글은 <프로젝트 125> 1등 글... 하편입니다. 어제는 상편... 이 올라갔답니다 후후. 흐름이 끊길 것 같아서... 좀 슬프네요. 렉이 너무 많이 걸려서 ㅠㅅㅠ 허허.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단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나가시기 전에 코멘트 한 번... 씩 부탁드릴게요 ㅠㅠ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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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제이(J)  5일 전  
 제이(J)님께서 작가님에게 5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퍼재  6일 전  
 퍼재님께서 작가님에게 1378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2
  퍼재  6일 전  
 마지막 남준이가 말한 게 완전 박히네요.. ㅠ ㅠ 마지막 움짤도.... 먼가 울먹이는 거라서 그런지 좀 슬퍼지는 그런 (。•́︿•̀。) ㅠ ㅠ ㅠ 남준이 글 넘 조아요 이런 분위기도 완전요 (˃̶᷄‧̫ ˂̶᷅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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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shie  6일 전  
 하ㅠㅠㅠ 너무 슬프구ㅠㅠㅠㅠ 그냥 너무 슬프다ㅠㅠㅠㅠ

 답글 1
  엘프아미  7일 전  
 8ㅅ8 뿌에에에엥ㅠㅠㅠ

 답글 1
  귀염둥❤  7일 전  
 귀염둥❤님께서 작가님에게 102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2
  귀염둥❤  7일 전  
 마지막 구절 읽자마자 정말 눈물 핑 돌았어요
 약간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문장에
 진짜 오만번 오열하고 갑니닷 ㅠㅠ ㅠㅠ
 이제야 해병같다는 말 진짜 너무 천재같아요
 단멸 님 천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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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리  7일 전  
 롯리님께서 작가님에게 24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2
  슉크림빵  7일 전  
 다 넘 좋지만 마지막 독백이 진짜 눈물 펑펑 오 리터예요...... 8ㅁ8 우째 이리도 글을 잘 쓰시는지 제 인생 멸 님께 걸엇읍니다 쾅쾅 사랑해요 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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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 전  
 흐어어엉ㅠㅜ 글 넘넘 잘 쓰시구... 아주아주 슬프네요 ( o̴̶̷̥᷅⌓o̴̶̷᷄ ) 글 잘 읽었습니당

 님께 댓글 로또 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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