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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김남준] 인애를 삼킨 해병上 - W.단 멸
[김남준] 인애를 삼킨 해병上 - W.단 멸








|_꼭 들어 주세요 ㅠㅅㅠ_|










0

여름은 정말이지 너무 덥네요
제가 그 여름과 인애를 삼켜드릴 테니
제발 저에게로 다시
돌아와 주시겠어요?


남준은 뜨거운 합숙 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성인 남자 열 댓이 한 공간에 같이 있자니, 숨이 막혀 뒈져버릴 것만 같은 남준이었다. 작년 여름보다 더 숨 막힐 듯한 더위.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또 걸려서, 남준은 애를 먹는 중이었다.

얼마 전 친해지게 된 형이 있는데, 이름이 민윤기고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위였나. 아무튼 요즘 내내 이야기를 공유하는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대학 얘기부터 애인 얘기까지. 남준은 늘 윤기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재밌었던 건 윤기 형의 옛 애인들 얘기였지만 말이다. 키는 자신보다 5센티 이상 작으며, 체구도 자신보다 작았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는 늘 믿음직스러운 형이었다.



남준은 여주에 관한 얘기를 종종, 윤기에게 많이 꺼내곤 했다. 윤기는 늘 남준이 예쁘다며 자랑을 해대니 얼마나 예쁘실지 궁금하다며, 제대하면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 물음에 남준은 너무 예뻐서, 형도 반한다며 장난 섞인 투로 거절하곤 했다.


남준은 스물셋. 윤기는 스물넷이었다. 아직 제대 날이 좀 남은 상태에서 보면, 둘 다 입대가 늦은 셈이었다. 남준은 스물 둘, 윤기는 스물셋에 입대를 했으니 말이다. 남준은 나이로 치면, 자신보다 일 년 더 늦게 군대에 온 윤기에게 무슨 사정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었다. 또 나이 어린 고참들한테 온갖 별별 소리 다 듣는데 괜찮냐며 묻자, 윤기는 머리를 긁적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ㅡ나이 어린 고참들한테 별별 소리 다 듣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인마.

ㅡ그건... 그렇네요. 허허. 그런데 형은 왜 늦게 왔어요?

ㅡ동생이 아파서.

ㅡ아...... 그러셨구... 나.

ㅡ넌?

ㅡ돈 벌이가 안 돼서요... 하하. 고등학생인 여동생이 있는데, 부모님... 돈벌이로는 빠듯... 해서.


남준과 윤기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얘기만 했지, 이런 무거운 얘기는 한 적이 없었기에 둘 다 굳어버린 듯했다. 윤기는 아픈 동생 때문에, 남준은 나이 터울이 조금 나는 여동생 대학 입시와 부모님 때문이었다. 남준은 이 암울한 분위기를 다시 바꿔보려 무슨 얘기로 화제를 돌릴지 고민하는 와중, 윤기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ㅡ그래서. 네 여친은 너 제대할 때까지 기다린 데?

ㅡ네, 요즘에도 맨날 연락해요. 시간 받아서 목소리 들으면, 훈련하고 돌아와서도 행복해요.

ㅡ제대하고도 연애해라.

ㅡ당연하죠, 저 안 놓쳐요. 절대.

ㅡ여자친구 분 성함이 임여주... 라고 했나?

ㅡ네, 임여주. 이름도 예쁘죠? 다음에 보여줄게요. 진짜 겁나 예뻐.


어진 사랑을 하고 있었던 우리는 한여름 무더위에 묵살당해 버렸다. 한여름밤에 사랑을 나눌 거라고 진득한 키스와 함께 약속한 너와 나. 나는 내 애인의 사랑을
인애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고놈. 고놈 때문에. 잘생기기는 존나 잘생긴 놈 때문에. 놓치긴 싫은 사람을 잡는 애절한 심정으로, 여름과 인애를 삼켰다. 나는 해병이다.


무지 더운 여름밤에
내게 키스를 해주세요

나부터 사랑해주면 안 될까요
사실 나만 사랑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는 이제 인애할게요
그대는 예쁜 사랑 해요
내가 모조리 삼켜줄 테니





 


A mAriNe wHo SwaLloWed loVe of lOve
인애를 삼킨 해병上



Trigger warning - 이별에 관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作ㅣ단멸





1

남준은 군대에 들어와서 사람이 좀 달라진 듯했다. 정리 정돈이라곤 못하던 남준이, 군대에 들어와서 정리 정돈을 잘해서 통화 시간을 받고, 말이다. 남준은 부모님께 먼저 안부 인사를 전하고는, 바로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준은 제 애인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한껏 보조개를 띄우곤 여주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달칵, 전화를 받았다.


ㅡ어... 김남준?

ㅡ임여주!!!

ㅡ네가 웬일이야...!? 군대에서 뭐라 안 해?

ㅡ나 정리 정돈 잘해서 시간 받았어.

ㅡ헐...... 김남준, 네가?

ㅡ왜... 그래서 좋아, 안 좋아.

ㅡ당연 좋지!!!


오랜만에 들은 애인의 목소리. 여전히 잔잔한 여주의 목소리는 남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여주의 중저음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져 있었던 거로 보아, 여주도 어지간히 남준의 목소리가 그리웠는지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여주의 그런 모습이 남준은 그리도 좋은지, 아까부터 계속 헤실 대고 있었다. 휴대 전화를 귀에다 처박고는, 절대 끊지 않을 기세였다.


ㅡ밥은 잘 챙겨 먹고 있지?

ㅡ당연하지. 완전 잘 먹고 있어 걱정하지 마.

ㅡ김남준... 해병대가서 반쯤 죽어오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래도 살아있네.

ㅡ야, 넌 그게 남자 친구한테 할 소리냐?

ㅡ농담, 농담이야.

ㅡ밥 잘 챙겨 먹고,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시간 얼마 안 남아서 끊어야 해. 사랑해, 임여주.

ㅡ사랑해 나도. 네가 보내준 사진, 열심히 그리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보고 싶어. 사랑해, 남준아.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 남준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여주가 그리고 있을 그림을 생각했다. 미대생인 여주는 틈만 나면 남준과의 추억을 그렸다. 취미라고 할까나. 남준이 입대를 하고 보내준 사진을, 여주는 남준이 제대할 날까지 열심히 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여주는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남준을 잊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남준의 가장 큰 속셈은, 자신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남준은 여주밖에 몰랐다. 자신이 제대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여주가 늘 걱정돼서, 시간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했다. 늘 자신의 전화를 반가워하던 여주가, 제 곁에서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대하고 나서도. 자신과 영원히.



남준은 여주와의 전화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윤기를 만났다. 윤기는 무표정으로, 애인? 하고 물었고. 남준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네, 형. 이라고 답했다. 윤기는 작게 웃으며 남준을 지나쳤다. 그리고 남준이 뒤로 돌아서려는 순간에 나중에 보자, 하며 아까와는 조금 다른 아이 같은 웃음을 짓고는 돌아섰다. 남준은 알다가도 모르는 형이라며, 속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2

밤이 되었다. 모두가 잠든 캄캄한 한밤중. 윤기는 잠이 오지 않는지 조심스레 남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남준은 자고 있지 않았다. 윤기는 안 자고 뭐 하냐, 개미만 한 목소리로 남준에게 말을 건넸고. 남준은 그럼 형은 왜 안 자는데요, 하며 받아쳤다. 그러자 윤기는 이렇게 말했다.

ㅡ불길해서.


남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기는 뭐가 불길하다는 것일까. 남준은 잠시 고뇌하나 싶더니 윤기에게 물었다.


ㅡ뭐가요?

ㅡ그냥 다. 네 여자 친구는 별 일 없데?

ㅡ에이, 형... 그게 무슨 불길한 소리예요... 당연하죠. 제 여자 친구는.

ㅡ조심해라, 너 군대 있는 동안, 다른 남자 꼬일 줄 누가 아냐.

ㅡ형, 여주 그런 사람 아녜요. 저 제대하면 같이 외국 여행 가기로 한 걸요.


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주는 그럴 사람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 소리를 듣고 남준은 내심 불안했던 건 사실이었다. 내가 없는 약 2년 동안. 여주는 과연 나만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여주의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이 일지 모른다. 아니, 당연히 나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21살부터 시작된 동갑내기 연애. 비슷한 성향으로 급격히 가까워졌던 두 사람. 영화를 볼 때도 늘 비슷한 취향이던 두 사람, 책을 고를 때도 늘 비슷한 책들을 고르곤 했었다. 남준에게 다시 찾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소중한 사람, 그리고 소중한 사랑. 2년이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또 일 년이 흐르고. 사정 때문에 군대를 1년 미루었던 남준이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여주는 혹여 나를 질려 하지는 않을까? 남준의 고민이 깊어가는 밤이다. 왠지 보내고 싶지 않은 밤, 남준은 잠들지 못했다. 여주를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신의 부재. 여주 옆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어야 했다.


윤기 형은 이 밤중, 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일까. 더운 여름날. 매미들이 울어대고, 졸렬한 바람이 부는 악독스러운 밤. 멀뚱히 누워 여주를 생각한다. 윤기 형 말대로, 여주의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남준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는 여주와, 그 옆에 또 다른 사람이 보인다. 조금 다부진 몸에, 쩍 벌어진 어깨. 남준의 심장 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3

남준은 윤기에게 어젯밤 눈을 감았을 때, 보였던 형체를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었다. 윤기는 남자네, 다부진 몸에 쩍 벌어진 어깨면. 하고 말했다. 남준은 왜 그런 형체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심란한 표정으로 빨리 점호 준비를 했다. 윤기는 다음에 전화할 때 물어보라며, 시큰둥한 얼굴로 옷깃을 매만졌다. 남준의 표정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생각해보니 여름 휴가가 얼마 안 남았었다. 남준은 그때 내려가 봐야겠다며, 마음을 굳게 먹은 듯했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여주의 얼굴. 설레기도 하고, 혹여 어젯밤에 보았던 그 다부진 형체의 남자가 여주의 옆에 있진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반기던 여주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남준은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제 애인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여주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믿는다면 다녀오라는 여주의 말을 굳게 믿고 남준은 군대를 왔다. 그래, 나는 여주를 믿어야 한다. 남준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ㅡ야, 정신 안 차려?

ㅡ어... 어. 네, 형.

ㅡ이 놈이 맞아 죽을 일 있나, 눈에 총기가 왜 이렇게 없어. 야, 여기... 군대야 인마.

ㅡ정신... 차릴게요.

ㅡ그래야지. 새꺄, 눈 똑바로 떠.


윤기는 어느 순간부터 넋을 놓고 있는 남준의 등을 두드렸다. 눈에 총기가 없는 게, 꼭 실연당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으니 윤기는 남준의 뒤통수를 한 대 가격한 거 같았다. 남준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서 있는다. 윤기는 그런 남준이 마음에 걸렸다. 소대장님께서 들어오시고, 둘의 대화는 곧바로 끊겨버렸다.





4

여주는 남이 보기에는 잘 그린 것만 같은 그림인데, 영 맘에 안 든다며 그대로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집어 넣어버렸다. 꽤 빳빳한 도화지였는데, 단번에 구긴 것을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후덥지근해서 그런지, 종이들은 다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여주의 기분도 그랬다. 너덜너덜. 다 낡아빠진 천 조각이 된 기분이었다.



그림도 도통 그려지지도 않고, 연필도 계속 부러지는 게 오늘은 운수가 안 좋은 날인가 보다... 여주는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전환 겸 냉커피를 사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울리는 진동. 여주는 남준인가 싶어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남준은 아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같은 과 후배도 아닌, 그렇다고 같은 대학교도 아닌. 전정국이라는 태권도 선수. 여주보다 3살 어린 연하였다.


ㅡ누나, 뭐해요?

ㅡ아... 그림 그리다가... 너무 안 그려져서 나왔어, 그냥.

ㅡ저랑 카페 가실래요?

ㅡ응? 마침... 커피... 사려고 했긴 했... 는 데.

ㅡ잘 됐네. 누나 학교 앞으로 가면 되죠?


커피 사러 나가는 건 또 어찌 알았는지, 때마침 연락한 정국. 요새 들어 부쩍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 이였다. 원래라면 학교 앞에 남준이 찾아왔을 텐데, 군대에 가 있는 놈이 뛰어올 수도 없고. 여주는 정국과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얼굴도 훤칠한 게, 성격도 좋아서 정국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많았다.


근처에 있었는지, 아니면 나와 커피를 마시려고 미리 계획하고 있었는지 몇 분 만에 도착한 정국. 여주는 엄청나게 빨리 왔네, 하며 놀라자 정국은 이렇게 답했다.




ㅡ누나 혼자, 땡볕에 세워두면 안 되잖아요.


어... 어. 그래. 고마워, 정국아. 여주는 조금 당황한 듯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또 오랜만에 들어봐서 말이지. 남준에게서도 종종 들었던 말이지만, 군대에 간 뒤로는 휴가 때만 얼굴을 보는 남준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동안 낯간지러운 말들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터라,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국은 자연스레 여주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걷기 시작했다. 여주도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3살 아래여서 그런지 조심스럽긴 했다. 정국은 그런 여주의 긴장을 풀어주려 일부러 누나, 라는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처음부터 누나라고 했긴 하지만 말이다.


스무 살 치곤 많이 듬직하던 정국의 옆에 있으면, 여주는 왠지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딱히 지금과 다를 건 없었지만 말이다. 성인이 되면, 무언가 많이 신기하고 새로울 것만 같았는데 그다지 다른 감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저 열여덟에서 열아홉에 올라왔듯이, 열아홉에서 스물로 한 살 더 먹은 것뿐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여주가 바라보는 정국의 스물은 조금 달라 보였다.


정국을 처음 만났던 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고. 잿빛 배경에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왠지 모르게 남준을 바라볼 때 느꼈던 감정을 아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모르는 남자와 술을 마셨다.





5

가로등 밑에서 차도 쪽으로 다리를 쭉 뻗고 있던 정국은 어딘가 고민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조금 앳돼 보이는 얼굴. 여주 눈에는 열아홉이라 수능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삶의 걱정거리가 늘어난 설익은 스물일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여 생각했다.


여주는 그저 정국을 보기만 했을 뿐, 가볍게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여주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손이 더러워질 날이 부쩍 많아져서, 남준과 함께 맞춘 반지를 항상 가방에 넣어 다녔는데. 반지에 발이라도 달렸는지 툭, 하고 떨어져 정국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이 아닌가. 여주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정국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정국의 눈은 생각보다 더 짙은 색이었다.


얼떨결에 성사된 만남. 정국은 여주에게 반지를 건넸다. 여주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정국은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그 순간 정국이 한 말은, 조금 의외이면서도 예상 가능한 말이었다.




ㅡ술 한잔하실래요?


정국이 여주에게 물었다. 조금 경직되거니와, 낮은 톤으로 말이다. 여주는 좋다고 답했다.


ㅡ네, 뭐... 좋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왜 좋다고 대답한 지는 돌이켜 봐도 모르겠다며, 그 순간이 떠오르면 자주 자신을 꾸짖곤 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되돌려도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았다. 다시 돌아가도, 왠지 좋다고 답했을 것 같았다.





이름이 뭐냐고 묻는 정국의 말에 여주는 바로, 임여주라고 답했다. 그 남자가 누군 줄 알고 냉큼 이름을 말했던 것인지, 여주는 아직 취하지도 않았는데 다른 무언가에 취했었긴 취했나 보다. 정국은 곧이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저는 전정국... 인데요, 갑작스런... 만남인데 부담스럽진 않으신가요... 약간 취기가 도는 정국의 달아오른 어조. 여주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국은 작게 미소를 띠었다.



처음 보는 이였지만, 여주는 전정국이라는 남자에 대해서 꽤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스무 살이며, 대학에 특기생으로 채용된 우리나라 태권도 유망주라고 했다. 그 뒤로는 딱히 별 얘기는 하지 않았다. 뭐, 얼마 전에 발목 부상을 입어서 며칠만 훈련을 쉰다는 둥, 이 세상은 동화 같지 않는다는 둥. 조금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계속 소주잔을 들어댔다. 여주는 자연스레 그 분위기에 취해 자신에 관한 얘기를 정국에게 족족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ㅡ저는... 미대생인데요. 그래도 나름 선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올해면 졸업하는데, 취업이나 할 수 있을는지......


정국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올해면 대학을 졸업한다는 여주의 말에 정국은 조금 흠칫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다, 까지는 예상이 가능했지만 4학년일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정국은 처음 보는 -그것도 3살이 많은- 여주와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정국은 그런 고민 따위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여주는 소주 한 병을 비우고서야, 무언가 잘 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오가는 질문에 그러시군요... 심심찮은 대답을 이어가며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 애썼다. 여주는 대화가 단절된 듯한 정적이 흐르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순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정국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순간. 남준을 바라보고 있을 때 느끼던 아릿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가슴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정국은 눈이 풀린 채로 내게 인사를 고했다. 그리곤 헤실 대는 웃음과 함께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나는 가방에 들어있던 낡은 볼펜을 들어 정국의 손등에 이렇게 썼다.


SUMMER DAY - Y





6

그놈은 용케도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손등 위에 적은 거라, 삐뚤빼뚤 일관되지 않던 글씨였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한 것 같았다. SUMMER DAY - Y. 획 들의 수를 세어보면 114443233 이 되는데, 거기서 Y의 획을 빼면 내 전화번호가 되는 것이다. 전화번호를 주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을 때, 종종 쓰던 방법이었다. 그놈에게 전화번호를 주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처음 봤었고, 어쩌다 지나칠 눈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놈과의 연락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ㅡ임여주... 씨 번호가 맞나요?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이미 번호도 알려진 마당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서, 냉큼 답장했다.


ㅡ네, 맞는데요.

ㅡ저, 전정국이에요. 그 태권도 선... 수.

ㅡ알고 있어요, 예상했거든요.

ㅡ무례한 부탁인 것을... 알지만... 혹시 종종 연락해도 되나요?

ㅡ무슨 용건이신지는 몰라도... 선을 넘지만 않으신다면요.

ㅡ감사합니다, 누나.


누나...? 얼떨결에 듣게 된 누나라는 소리. 나는 누나라는 말이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어 전정국이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에 토를 달지 않았다.


딱 한 번의 만남. 한 번의 술.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이렇게도 찾아오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인연. 전정국과 인연이 있었을까? 문득 김남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김남준이라는, 해병대에 간 남자 친구가 있다고 전정국에게 말하지 않았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전정국에게 남친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전정국과 만나는 횟수는 늘어만 갔다. 나는 여전히 김남준을 죽도록 사랑한다. 전정국이 남친 있냐고 물어보는 날에는, 왠지 말을 못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7

여주와 정국은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주는 조금 전에 그리다,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구겨버린 그림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았고. 정국은 다친 발을 가리키며, 사실 많이 걸으면 안 되는데 누나 보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여주가 남준없이 보냈던 혼자인 순간들. 왠지 그 빈자리가 잠시 남아 정국으로 채워진 기분이라, 여주는 시리던 자리가 제법 메꿔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울리는 진동 소리. 여주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동은 계속해서 울렸다.


ㅡ전화... 안 받아요?

ㅡㅇ, 어...? 어... 그래 받아야지.


여주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남준이었다. 평소 같으면 진동이 울리자마자, 남준인가 싶어 화색을 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에는 정국이 있었고, 정국은 여주 남자 친구의 존재를 모른다. 그렇다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주는 왠지 기분이 묘했다. 여주는 남준을 죽도록 사랑한다, 그러니 정국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신경이 쓰였다. 여주는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남준의 전화를 받았다.




ㅡ임여주! 내 목소리 듣고 싶었지? 왜 이렇게 늦게 받아~

ㅡ그러게, 왜 늦게 받았지. 오늘도 시간 받은 거야?

ㅡ좀 있음 휴가잖아, 언제 시간 돼?

ㅡ어...? 언제 시간 되냐고?

ㅡ응, 놀러 가자 우리. 맛있는 거도 먹고.

ㅡ내가 나중에 문자 보낼게, 언제 시간 되는지 당장 모르겠다.

ㅡ그래, 그럼. 우리 애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네. 사랑해!

ㅡ응, 나도.


늘 말끝에 사랑해를 늘 붙이던 여주가 오늘은 남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응, 나도. 라는 말로 대체한 거 같았다. 정국은 아직 해맑은 얼굴로 여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여주의 목소리만 들어서 느끼지 못했지만, 여주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남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여주와 놀러 갈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여주는 왠지 그럴 기분이 아닌 듯했다.

정국은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다.


ㅡ누구예요?

ㅡ누구냐고?

ㅡ네.

ㅡ어...... 친한 친구. 완전 친한.

ㅡ아, 그래서 놀러 가시... 려고요?

ㅡ응... 응.

ㅡ다음에 저랑도 놀러 가요, 근사한 데로.


여주는 뭔가가 많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애인을 친구라고 말하는 것. 완벽히 잘못된 것이다. 친구와 연인. 남준은 콕 집어 연인인 것이 분명한데 여주는 정국에게 남준을 친한 친구라고 말했다. 남준도 놓치기 싫지만, 눈앞에 있는 정국을 놓치는 것 또한 싫었을까.

여주는 정국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주 큰 거짓말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원인을. 여주는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사랑을 잃는 방법을 터득한 것만 같았다.



그 뒤로도 남준의 전화가 몇 번 더 걸려왔었다. 정국이 옆에 있었던 건 그 일 말고도 한 번 더 있었다. 조금 시큰둥해진 여주의 응답에, 남준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디 아프냐며. 휴가 나가면 병원부터 같이 가야겠다고, 괜찮은 분위기를 조성하려 애썼다. 그때 정국은 또 물었다. 친구분 이신가 봐요? 여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준은 전화 통화를 오래 못해서 아쉽다며, 내려가면 지겹도록 안아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낯간지러운 말까지 덧붙었다. -아마 키스 정도의 말이었던 거 같다- 여주는 시큰둥하게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남준과의 전화가 끊어지고, 여주는 다시 정국 앞에 섰다. XX...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여주는 정국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 얘 좋아하는 거 같아. 전정국. 키스하고 싶어.











♡♡♡♡



본 글은 <프로젝트 125> 1등 글 입니다... 아직 얼떨떨한데 기분은 좋네요. 분량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나와버려서... 한 번에 올렸더니 렉이 엄청 걸리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눠서 올립니다 ㅠㅅㅠ ㄴ, ㅇ 중에 저는 ㅇ. 인애로 주제를 잡고... 썼던 글입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하루 되세요 ~♡~ 사랑합니다!



2019.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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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낌뷔  6일 전  
 남준옵 빙의글이라뇨 ㅠㅠ 너무 좋아요 ㅠ

 낌뷔님께 댓글 로또 5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퍼재  6일 전  
 어제 단순란에 하편이 떠있길래 상편을 이제야 보네요 ㅠ.ㅠ 남준이가 남주인 글은 완존 오랜만이라서 엄청난 기대가 댑니다 상 편은 완전 조았고 분위기도 엄청 좋았어요 ㅠ ㅠ 하편 잘 볼게요 ⸝ʚ̴̶̷̆ ̯ʚ̴̶̷̆⸝⸝

 퍼재님께 댓글 로또 15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2
  천설미루  6일 전  
 헤에 여주야ㅜㅜ

 답글 1
  귀염둥❤  7일 전  
 진짜.....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ㅠㅠ
 얼른 하 편도 읽고 올게요 ㅠㅠ

 귀염둥❤님께 댓글 로또 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슉크림빵  7일 전  
 멸 님... 제가 우째 멸 님 글 올라온 걸 못 보9...... 으헝헝 자책자책파워예요 8ㅁ8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항상 멸 님 글은 언제나 체고구요 ㅠㅠ 여주가 얼른 마음을 제대로 알고 관계를 정리해야 할 텐데 말

 슉크림빵님께 댓글 로또 14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2
  웅.뾰  7일 전  
 난 단ㄹ며리님을 사모합니다........아니......글 이케 잘 쓰셔두 대는 부분입니까..?? 저 지금 감격에 눈물 주륵주륵 흐르고흘러 두만강을 이루고 잇어요....울 단며리님...글....쥐짜 만ㄴ이 사랑하구요

 웅.뾰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2
  위온  7일 전  
 위온님께서 작가님에게 11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달방-  7일 전  
 남준이 대신 빈자릴 채워줬는데 어떻게 안 흔들려

 달방-님께 댓글 로또 3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BTSforever♡  7일 전  
 헐... 안돼 여주야 정신차려ㅜㅜㅜ

 BTSforever♡님께 댓글 로또 22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1
  뽀짯  8일 전  
 여주야 정신차려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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