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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빙의글 그리니쉬 스펙트럼 - W.문교연
그리니쉬 스펙트럼 - W.문교연



bgm ciki / syndrome



“나 너 안 사랑해.”
“사랑해.”
“아니라구 난.”
“사랑해 이그린.”

무작정 사랑한단 말을 외며 김석진은 녹차라떼를 쪽쪽 빨아댔다. 근본 없는 고집에 이그린은 헛웃음만 뱉었다. 잠깐 앙다문 입술을 다시 열었다.

“나 잊고 살아.”
“...”
“원래 없던 사람처럼.”
“그린아.”
“응?”
“내가 널.”
“...”
“내가 널 어떻게 잊어.”

김석진이,

“나 갈게.”
“가지마.”
“우리 헤어진 거다.”
“나쁜 년.”
“알아. 그니까 너도 나 깔끔하게 잊어.”

이그린을?










그 리 니 쉬
스 펙 트 럼
Greenish Spectrum










01

담배향 뒤섞인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까만 메신저백을 대충 휘둘러 어깨에 걸쳐멨다. 오버핏의 반팔티가 건조한 바람에 펄럭였다.

한 달 만에 김석진이 캠퍼스에 얼굴을 비췄다. 시디과 공식 캠퍼스 커플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던 이그린의 부재는 미대 건물 이곳저곳을 부유하는 김석진의 홀로서기를 더욱 부각시켰다. 흐린 시선으로 무기력한 다리를 질질 끄는 김석진을 마주칠 때면 사람들은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모습이 꼭 금방이라도 가쁜 숨을 멈출 듯한, 모래 위 헐떡이는 고래마냥 위태로웠던 까닭이다. 모두가 김석진을 측은히 여겼다.

우아하게 던져지는 동정의 시선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석진은 애써 그것들을 무시했다. 그걸 받아주는 순간 스스로 이그린의 부재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닌가. 적어도 김석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그린이 오늘따라 더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교문에 들어설 때부터, 아니 개찰구를 지나쳐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을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김석진은 혼자가 됐다는 걸 다시 뼈저리게 느꼈다. 북받치는 감정에 잠시 상수역 2번 출구 근처에서 붙박이처럼 서 있었다.

역전 상가들 사이 좁은 골목에 들어가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요량이었다. 다만 거기서 불붙은 게 담배 끝자락이 아니라 터진 둑 마냥 흘러넘치는 방대한 추억인 것이 문제였다. 김석진은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빼들고 발로 꾸깃꾸깃 밟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새 담배들로 가득 채워진 담뱃갑을 꺼내 바닥에 떨궜다. 구석진 곳에 고이 모셔뒀다. 돈 없지만 운좋은 고등학생들이 이걸 발견하고, 어리숙한 연기들로 태워버릴 장면을 상상했다. 시시껄렁한 얘기들과 함께. 이런 게 선善이지, 그렇지?

김석진은 미련 없이 골목길을 벗어났다. 이그린의 잔재를 연기에 실어 날려 보내는 거 오늘도 실패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02

이그린의 영역이란 게 아주 깊고 끈적한 것이어서 김석진은 줄곧 그 늪에 빠져있곤 했다. 솟아오르려 허우적대봐도

“너도 참 지긋지긋해.”

그럴수록 더 잠겼다.

첫째, 김석진은 녹차를 좋아했다. 아직도 좋아한다. 참 지긋지긋하다고, 질린 표정의 박지민이 말했다. 김석진의 꼴을 석연찮게 여겼다. “뭐가?” 하고 능청스레 대답하며 김석진이 녹차라떼를 한 번 더 빨았다. 저 액체 이름이 녹차라떼가 아니라 그린티 프라푸치노였나. 이름이 뭐가 됐든 초록색인 건 확실했다. 박지민이 단박에 인상을 구겼다. 입술을 윗니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알잖아 너도.”
“모르겠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건데.”
“이렇게가 어떻겐데?

박지민이 김석진의 초록색 반팔티를 쳐다봤다.

“몰라서 묻냐?”
“방금 모른다고 했잖아.”
“그래? 그럼 똑바로 들어.”
“...”
“네가 이렇게 산다는 건,”

둘째, 김석진은 초록색 반팔티를 자주 입었다. 덕분에 김석진의 별명은 삼 년 내내 수풀부기였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어 김석진도 딱히 그 별명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초록색 티를 입는 김석진을 보며 언젠가 이그린이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너 보면 채식주의자가 돼야만 할 것 같아.” 도대체 채식주의와 초록색 티셔츠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아마 초록색 식물이 떠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어찌 됐든 어느 순간부터 이그린도 김석진을 따라 초록색 티를 입기 시작했다. 시디과 공식 커플에서 한 단어가 바뀌었다. 시디과 공식 수풀. 지인들은 이그린을 이름 값 하는 애라 칭했고, 김석진을 이그린 한정 광팬이라 부르곤 했다. 비 내리는 날이면 초록색 우산을 같이 썼다. 초록색 티를 입은 채로. “너네만 보면 눈이 멀 것 같아...” 박지민은 그런 날이면 이그린과 김석진 보기를 꺼려했다.

“네가 이렇게 산다는 건...그러니까.”
“이그린이 그랬어.”
“뭐?”
“원래 없던 사람처럼 잊고 살으라고.”
“...”
“근데 난 그게 안 돼.”
“...”
“못 잊어. 자꾸 후벼 파는데 어떡해?”

김석진이 여전히 녹차라떼를 마시는 이유도 초록색 티를 자주 입는 이유도 모두.

“김석진. 잊어.”
“나한테 잊으라고 강요하지 마. 이그린 지우라고 하지 마. 걔 잔재만으로 나는 살아가. 잊고 살으라고? 걜 잊었는데 어떻게 살아. 지우는 순간 나도 사라질 거야.”

아직도 내 세계는 초록이니까.










03

“살자 김석진.”
“...”
“살으라고, 살라고.”

원래 이주년 때 정동진에 가려고 했었다. 근데 이천구년 구월 이십일에 김석진이 기르던 고양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그게 이주년 되기 딱 일주일 전이었다.

이그린은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김석진의 자취방에 찾아갔다.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는 현관을 헤집고 들어간 방 안은 담배연기만 자욱했다. 고양이가 자주 물어뜯었던 쿠션을 껴안고 죽은 듯 누워있는 김석진을 뒤로하고 이그린은 당장 창문부터 열었다. 잿빛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었다. 콜록대며 김석진 앞으로 돌아왔다. 입에 물린 담배를 빼냈다. 김석진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그린은 폴더폰 화면을 김석진에게 들이밀었다.

“오늘 며칠인지 알아?”
“...”
“살아 줘 석진아.”
“...”
“너 사는 거, 그거 우리 이주년 기념선물로 하자. 여행이고 정동진이고 다 필요 없으니까.”

이그린이 울기 시작했다.

“제발. 나는 널 사랑해서 죽고 싶으니까.”










04

다소 일방적이고 조급했던 이그린의 이별 통보를 받은 김석진은 한 달을 미쳐 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 김석진은 이그린의 병실 안에 서 있었다. 호흡기를 달고 미동도 없이 흰 천장 아래 누워 있는 이그린의 모습은 김석진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그러니까... 이거 연극?”
“절대 아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김석진을 그린의 병실로 데려 온 박지민의 얼굴이 복잡함이 스쳤다. 이그린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야! 고민 끝에 김석진에게 이그린의 투병 사실을 밝히자마자 김석진은 마시던 녹차라떼를 그대로 뱉어냈다. 뭐 씨발…뭐? 김석진이 울부짖었다. 걔 곧 죽는다고. 의사가 그랬어. 침통한 표정의 박지민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쯤 정신이 나간 김석진이 후들대는 다리를 끌고 이그린의 침대로 다가갔다. 힘 빠진 손을 들어 이그린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 평소완 달랐다. 느릿한 시선을 이그린의 얼굴 쪽으로 옮겼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래 감춰둔 예쁜 눈동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러려고 헤어지자고 했냐?

없던 사람처럼 깔끔하게 잊으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쩌면 이그린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 이그린.”

김석진은 절대

“사랑해 그린아. 제발...”

이그린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05

“살자 김석진.”
“...”
“살으라고, 살라고.”

병실에서 눈을 뜬 이그린이 본 건 울고 있는 김석진이었다. 김석진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일어나면 화부터 내고 싶었어. 왜 말 안했냐고. 헤어져놓고 이렇게 뒷통수 치는 건 또 어디 있냐고. 왜 니 상황을 내가 박지민 통해서 들었어야 했냐고.”
“박지민 진짜... 말하지 말라니까.”
“가지마. 나 너 없으면 못살아.”

이그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김석진 잘 들어. 들었겠지만 난 다시는 너랑 사랑 못해. 그래서 나도 미치겠어. 억장이 무너져.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진짜 미치도록 너무 원망스러워.”
“...”
“근데 너 사랑한 시간만큼은 절대 후회 안해. 너는 그 시간 잊고 살아. 내가 그 시간 다 안고 갈 테니까.”

김석진의 눈에 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눈가를 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벌게진 눈으로 이그린을 노려봤다.

“내가 말했잖아. 원래 없던 사람처럼 잊으라고.”
“넌 끝까지...”
“그래 내가 끝까지 나쁜년 할거야. 너는 나 욕하면서 보내. 그리고 깨끗이 잊어. 그리고 제발 살아. 꾸역꾸역 살아 줘.”
“...”
“이제 가. 할말 끝났어.”

그게 김석진이 들은 이그린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06

가지만 휑뎅그렁한 나무 밑 벤치를 손으로 털어냈다. 찬 눈덩이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김석진이 거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공강이었고, 박지민은 커피숍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리고 김석진은 담배를 끊었다.

백일 때 선물받은 갈색 가죽 지갑을 꺼냈다. 이그린과 찍은 스티커 사진 위로 눈이 떨어졌다. 흰 것이 금세 형체도 없이 녹아버렸다. 김석진이 사진에 손을 얹었다.


이그린의 영역이란 게 아주 깊고 끈적한 것이어서 김석진은 줄곧 그 늪에 빠져있곤 했다. 솟아오르려 허우적대봐도

‘내가 어쩌자고 널 사랑해서...’

그럴수록 더 잠겼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을 안고 가겠다던 이그린과 달리 김석진은 그 순간들을 하나하나씩 풍선처럼 날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허둥지둥 대지마. 천천히 해보자. 그건 애초에 페인트를 들이부어도 지울 수 없는 거였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 리 니 쉬
스 펙 트 럼
Greenish Spectrum



I wish love you
아무도 모르지
어떻게든 너와 만나서 예쁜
거짓말은 이제 아닐 거야
부디 내게 있어줄래 이대로

있잖아, 이게 다 꿈이었음 해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
둘이 마시던 차와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괜찮다고

Ocean, 우리 마지막으로 본 영화
Pink paint 들고 있던 Betty
보다 네가 더 죽일 듯 아름다워 그니까

이제는 날 지겹다고 말해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해
언제부터 그랬냐고 물을 때
네 표정엔 쓴웃음만이 가득해
내 슬픔을 견딜 수가 없어요
외로워서 죽을 것만 같아요
어쩌다 다른 사랑을 해도 널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날 죽일 것만 같은 네게 병이 돼
주변에선 외면하고 다른 얘길 해
I know, 이제는 없지
어딜 가도 목소리만 들려와, 맞지?

이젠 네가 날 데리러 와줘
아무 말도 없이 날 세게 안아줘
지금은 오직 널 만나고 싶어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게

I was thinking you are
if I could live without you
너 없이 내가 뭘 해, 아무것도 못해
이제 나도 견딜 수 없어

그때는 네가 기다리는 거야
너와 내가 만날 수 있도록
always stay, always stay
did you die for me?

It`s killing me I loved you
don`t love everything


ciki / syndrome







1200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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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박하  17일 전  
 엄마 사랑해 내 네이버 비밀번호 교연486 이야

 답글 2
  쌍쌍바두개  17일 전  
 와.....진짜 필력 대단하시네요

 쌍쌍바두개님께 댓글 로또 2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블루리셋  18일 전  
 블루리셋님께서 작가님에게 12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언니는손만잡고잔다  20일 전  
 언니는손만잡고잔다님께서 작가님에게 28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언니는손만잡고잔다  20일 전  
 아아... 담배 고양이 시한부 처돌이는 울어요... 교연 님 사랑에요......

 언니는손만잡고잔다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단멸  20일 전  
 단멸님께서 작가님에게 35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1
  여름내음  20일 전  
 여름내음님께서 작가님에게 100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여름내음  20일 전  
 여름내음님께서 작가님에게 279점의 포인트를 선물하였습니다.

 답글 0
  송우기..  31일 전  
 글 너무 이쁜데요ㅠㅠㅠㅜ 오쩜

 답글 0
  애들러ᅠᅠ  32일 전  
 교연 님 문장 하나 하나가 여운이 너무 깊고 술술 읽혀서 정말이지 ㅜㅜ 제가 볼 수 있는 글이란 게 넘 영광스러워요... 문장력이 정말 뛰어나시구,,, 정말 정말 ㅜㅜㅜ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애들러ᅠᅠ님께 댓글 로또 1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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