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날이 따뜻해져서 베란다 창을 통해 거실로 봄볕이 새어 들어온다. 윤기는 어제 너무 집안일에 신경을 쓴 탓인지 꾸벅꾸벅 졸려오는 것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때마침 거실로 나온 여동생은 잠든 윤기를 발견하고 윤기에게 다가가 섰다.
"윤기오빠, 많이 피곤했나보네."
여동생이 윤기의 앞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꼭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피곤이 몰려오더니 윤기의 곁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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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나 뭐지? 나 왜 한복을 입고 있는 거지? 설날도 아닌데. 여주는 기와집 마당에 놓인 연못을 통해 자신이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금 전에 잠들었으니 분명 꿈속은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나 선명한 꿈은 처음이다.
"여주야. 거기서 무엇을 보고 있느냐?"
"윤기 오라버니!"
잠깐만. 오라버니? 나 언제부터 오빠들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더라? 윤기도 여주와 마찬가지로 남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글 공부를 하신다더니 어찌 나오신 겁니까?"
"매일 같이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속이 답답하여. 문틈 사이로 네 모습이 보이길래 나와 보았다."
"제가 공부를 방해한 건 아닌지요?"
여주는 윤기의 공부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윤기는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여주가 예뻐 보여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예쁘게 웃는다.
"방해라니 오히려 도움이 되었지. 나에게 휴식을 주지 않았더냐?"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여주가 환한 미소로 답하자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여주에게 닿고 싶어진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다. 사실상 진짜 민윤기라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하는 욕심이 든다.
"지민오라버니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순이가 지민오라버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요."
"그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순이에게 호되게 말해두었으니."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는 지민오라버니 일에는 항상 발벗고 나서십니다. 특별히 지민오라버니를 아끼시는 연유가 있으신지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이지 않느냐. 그러니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윤기는 자연스럽게 답하긴 하였으나 여주에게 의외로 예리한 면이 있다 싶다. 항상 순하게 웃고 있어 그런 면은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치면 태형오라버니가 더 문제이지 않는지요?"
순간 집 뒤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장독이 깨지는 소리다. 여주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려 하자 윤기가 여주의 앞을 가로 막아선다.
"내가 다녀오겠다. 너는 여기에서.."
"무슨 일인지 저도 알아야지 않겠어요?"
여주가 앞서 나가니 윤기는 어쩔 수 없이 여주를 뒤따라 뒤편으로 나간다. 그곳에는 깨어진 장독 파편 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태형이 있었다. 태형은 이미 일어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모르고 있다 여주를 발견하고서는 도둑이 살림을 훔치려다가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여주야.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다 설명하마."
"태형이 오라버니이!!!"
역시나 여주가 생각하기에는 태형이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인물이다. 여주가 열을 올리는 것과 달리 윤기는 소리의 근원이 단순히 태형이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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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는 지민오라버니가 좋아.]
"지민오라버니!"
"아니! 순이가 아니더냐?"
지민은 순이를 마주하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다. 그 이유라하면 순이가 지민이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것도 모잘라 누구의 장갓길이라도 막으려는 속셈인지 지민에게 눈독들이는 여인들을 모두 겁주고 다니는 것이다. 지민은 순이를 만나면 순한 성품에 어떻게 거절해야할 지를 몰라 늘 끌려다니기 십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