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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공통분모와 어지러운 복숭아 - W.김깨

 

 

 

 

 

[전정국]복숭아 외사랑

 

 

 

 

 

 

09. 공통분모와 어질러진 복숭아

 

 

 

 

 

 

​*글 속의 계질은 여름* 

 

"그래서 그때 걔가.."

 

"집에 가고 싶다."

 

그러면 간식도 먹고, 정국도, ㅇㅇ의 머릿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부유하다 하나가 그대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얌전히 앉아있던 제 짝꿍의 자리를 버젓이 빼앗아 앉고는 종알대는 지현의 말허리를 잘라먹은 ㅇㅇ이 힐끔, 옆에 앉아 있는 지현을 곁눈질했다.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지현은 ㅇㅇ이 제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미안, 무슨 얘기 중이었어? 지현이 턱을 괸 손을 바꾸며 심드렁하게 웅얼거렸다.

 

"아 됐어, 너한테 썸이니 뭐니 얘기 꺼낸 내 잘못이지."

 

썸. 간략하고도 강력한 단어를 듣자마자 ㅇㅇ은 왜 지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멍청한 공상에나 빠져있는 것보다 친구와 비슷한 공통분모를 가지는게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인데. 비록 그걸 꺼내보일 순 없어도, 속으로나마 같은 처지임을 생각하면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단 기분이 덜하겠지. ㅇㅇ이 입을 우물거리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줄 순 없냐고 작게 물었다. 지현이 귀찮아하며 신경질 내면 어쩌나 하는 ㅇㅇ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바로 눈을 빛냈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이야기가 순식간에 시작점으로 되돌아갔다. 

 

지현이 들려준 이야기는 꽤 장황했지만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걔`라는 아이는 학원에서 처음 만났으며, 키 크고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또 지현에게 무척이나 다정하다고 했다. 또 언제는 아무 이유 없이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주전부리를 남몰래 손에 쥐어주었다고 했다. 지현은 여기서 `남몰래`를 몇 번이나 강조했다. ㅇㅇ은 부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부럽기도 했고, 또 지현이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아서. ㅇㅇ은 지현이 열심히 떠들어대는 그 다정한 남자에게 정국을 잠깐 대입시켰다가 금새 머리를 털어내며 잊었다. 그건 정국답지 못하다. 여러면에서 그렇지만, 일단 다정하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사탕이나 초콜릿 뭐 그런 것들이 일단 귀여운 매개체잖아?"

 

그러니까, 걔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지현이 자신만만하게 자부했다. ㅇㅇ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 되묻자 잠시 멈칫하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적어도 나는 좋아하니까. 그걸로 됐어. 지현의 배아픈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ㅇㅇ은 자신이 여기서 뭐하는 건지 싶었다. 단시간만에 새로운 공간에서, 바로 낯선 상대를 좋아하고, (ㅇㅇ이 생각하기에) 정말 빛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지현과 다르게 상대와 아주 근접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정체되어 있는, 나아가도 굼벵이보다 더 느리게 나아가고 있는, 사실 나아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자신과 정국. ㅇㅇ은 여기에 정국을 포함시켜도 될지 잠시 생각했다.

 

ㅇㅇ이 노력하는 것 만큼의 아주 조금이라도 정국이 힘써주면 그것이 부리는 원동력은 ㅇㅇ의 상상을 능가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완벽한 사랑이 완성되는거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ㅇㅇ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감정 실린 짙은 날숨에 지현이 ㅇㅇ을 떠보듯 물었다. 너는 좋아하는 애 있냐? 어느새 제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버린 ㅇㅇ이 자동적으로 고개를 도리질쳐도 지현은 쉽게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거짓말 치지 말고, 그때 그 넘사벽은? 

 

넘사벽? 기억을 되짚자 그때 그 도서관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처음으로 정국이 환하게 웃는 걸 본 날, 그리고 정국을 좋아하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감출 이유를 잃어버린 날이기도 했다. 넘사벽은 무슨, 나 안 좋아해. 그렇게 말하는 ㅇㅇ의 눈빛이 살짝이 흔들리는 것을, 지현은 놓치지 않았지만 애써 모른척하였다. 지현은 들추고 싶지 않은 감정을 억지로 보고 싶은 악질적인 면은 갖고 싶지 않았다. 그게 준비되지 않은 제 친구라면 더더욱. 대신 차차 발돋움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그러곤 일부러 재미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투덜댔다. 맹탕이네.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ㅇㅇ을 볼수록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순진해 빠진 이 순둥이에게 누가 바람을 집어넣었을지. 돌쇠가 마님을 보쌈하는 그런 추접한 바람 말고, 간질간질해서 못 견디는 그런 바람 말이다. 맞바람이 아니고 외바람인 것이 분명하니 곧 한 사람의 얼굴엔 피골이 상접해가는게 눈에 선하구나. 괜히 ㅇㅇ이 안쓰러워지는 마음에 ㅇㅇ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온통 헤집어놓았다. 은은한 샴푸냄새가 지현의 코를 자극했다.

 

"가르마 겨우 탔는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절망적으로 책상 위에 엎어지는 ㅇㅇ을 향해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그깟 가르마, 내가 다시 타줄게. 나 빗도 있어. 머리 좀 헝클어진게 뭐 대수라고 벌써부터 불퉁 나온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꾹 집어넣었다. 두 명의 여학생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치 초여름임에도 화단에 끈질기게 서 있는 모란을 연상케 했다. 생각보다 질기고, 아름다운 꽃. 그 덕에 두 사람의 뒤를 채우던 지루한 교실 풍경이 순식간에 여름의 햇살처럼 화사해졌다. 초여름을 맞은 화실 마냥 푸릇함이 곳곳에 베여있는 듯 했다. 창밖으로 작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금새 자취를 감추었다.

 

**

 

주번은 이미 텀이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간지 오래였지만 정국과 ㅇㅇ의 함께하는 자습은 계속되었다. 손가락으로 만난 수를 세어보면 그리 많지도 않건만 정국과 ㅇㅇ도 모르는 새에 그것이 오랜 습관처럼 몸에 베어버린 덕에 둘 모두 그만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보통은 첫날 함께 자습한 그날처럼 ㅇㅇ이 그 전날 문제를 풀고, 그 중에서 모르는 문제를 정국에게 물어보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정국도 자신이 모르는 문제를 ㅇㅇ에게 물어보는 추세였다. 

 

물론 ㅇㅇ 역시 알지 못해 둘이 머리를 맞대다 결국 답안지의 풀이를 확인하는 쪽이 대부분이었지만, ㅇㅇ은 마냥 좋았다. 사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이제 바랄 것도 없겠건만. ㅇㅇ이 작은 별표가 쳐진 다음 문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 이것도, 모르겠어. 한참을 기다려도 흐르는 정적에 고개를 들자 정국은 자신이 가르키고 있는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더 ㅇㅇ 쪽으로 틀어서, 그러니까..

 

"..너 치마 너무 짧아."

 

맞다, 치마 쪽. 뚱딴지같이 뜬금없는 말에 ㅇㅇ이 멍청하게 입을 벌리자 정국은 태연하게 다시 문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전부터 생각한거야. 정국은 마치 방금 막 한 말이 아무런 숨겨진 의미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듯 덤덤했다. 그 말투에 걸맞는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침묵한 ㅇㅇ이 정국은 신경쓰였다. 혹시 내가 줄곧 자신의 다리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조금 조마조마했다. 그럼 내가 난처해지는 상황 아닌가. 괜히 말했나 싶은 후회가 들어 뒤늦게 입을 가렸다. 

 

여전히 초점 없이 흐리멍텅한 눈빛의 정국이 평소 같지 않아 ㅇㅇ은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에서 조금 비껴나간 손가락을 다시 올곧게 펴 문제번호 바로 위에 콕, 찍어내렸다. 이거. ㅇㅇ의 선홍빛 손톱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든 정국은 아, 작게 말하곤 그제서야 여느때처럼 문제를 풀이하기 시작했다. 

 

문제 위에 동그라미를 치기도 하고 밑줄을 긋기도 하는 정국의 손에는 평소에 쓰던 검은색 샤프 대신 분홍색 샤프가 쥐어져 있었다. 운 없게도 필통을 그만 집에 놓고 와버려서, 색깔도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은 ㅇㅇ의 샤프를 빌리게 된 것이다. 

 

정국이 그 샤프를 잡고 글씨를 적고 있노라면 꼭 ㅇㅇ처럼 글씨를 써야할 것만 같은 사명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ㅇㅇ처럼 아기자기하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그래서 또 그렇게 문제집 위에 정성스럽게 한 자씩 적다 보니 시간이 평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평소보다 물살이 센 강물을 만난 듯 정국의 시간도 오늘은 정국과 함께 보폭을 맞춰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오늘도 정국에게 남은 것은 ㅇㅇ의 분홍색 샤프와, 미쳐 다 풀지 못해 여백의 미를 자랑하는 문제집 뿐이었다. 아니, 굳이 하나 더 추가하자면 끈질기게 달라붙는 ㅇㅇ의 시선까지. 처음엔 불쾌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끔 보복성으로 ㅇㅇ을 빤히 바라봐주는 정도면 충분했다. 정국이 남은 페이지를 표시할 동안 ㅇㅇ은 가방에 자신의 가방 안에 난잡하게 어질러진 물건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정국에게 샤프를 돌려달라 말하려다 관두었다. 때 되면 알아서 주겠지. 가방의 지퍼를 닫는 작은 잡음이 들리고 ㅇㅇ이 어깨 위에 가방을 멨을 즘엔 정국 역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자신의 샤프를 건네는 손길에 손사레쳤다. 자신이 지금 이 샤프를 받으면, 정국은 야자시간에 분명 짝에게 필기구를 빌릴 게 뻔했다. 그리고 그건 ㅇㅇ의 입장에선 실로 샘나는 일이었다. 나중에 줘. 이따가! 

 

정국은 알겠다며 끄덕이곤 가방에 앞주머니 속으로 샤프를 집어넣었다. 정국이 지퍼를 닫을 동안 왠지 어색하게 흐르는 공기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먼저 자리를 뜬 것은 ㅇㅇ이었다. 도서관을 나오자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목으로 대충 닦으며 도망치듯 도서관을 떴다. 

 

빠르게 발을 놀리다 한동안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던 치마가 또 불쑥 튀어나왔다. 내 치마가 그렇게 짧아? 저번부터 ㅇㅇ의 머릿속을 난잡하게 만든 장본인인 치마를 또다시 들춘 건 정국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적으로 정국의 책임이었다. 조금 괘씸한 마음에 작게 욕을 했다. ㅇㅇ이 짧은 치마를 끌어내리며 여자 화장실로 들어간 순간, 정국은 도서관을 나오다 문득 귀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장담 할 순 없지만, 아마 마음도 살짝 그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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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다가선  2일 전  
 어짧아(박력

 답글 0
  빙그리  2일 전  
 너무 설레 진짜ㅠㅠ

 답글 0
  규리미♥  2일 전  
 진짜글잘쓰신담...

 규리미♥님께 댓글 로또 9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전여리  3일 전  
 왤케 글이 너무 설레요ㅠㅠㅠㅠ

 답글 0
  칩침  5일 전  
 아ㅠㅠ 너뮤설레요♥♥

 답글 0
  AMY1089  6일 전  
 설렘

 답글 0
  ♥햇님  6일 전  
 완전 설렌다♥

 답글 0
  ♡변승미♡  6일 전  
 서로 좋아하기 시작한건가요?

 ♡변승미♡님께 댓글 로또 8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_은설  8일 전  
 이글 왜 인순 안올라가나요오 ..? 이렇게 재밋는게 ..

 답글 0
  만월  9일 전  
 징짜....설래다 쥭겠뜨아ㅏㅏ

 답글 0

63 개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