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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복숭아와 섬유 유연제,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 W.김깨

 

 


 

 
 

 

 

[전정국]복숭아 외사랑

 

 

 

 

 

 

08. 복숭아와 섬유 유연제,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것

 

 

 

 

 

 

*글 속의 계절은 여름*

 

방과후의 도서관은 정국이 굳이 심화반을 들지 않고 도서관에서 자습하겠다 결심한 이유가 눈에 보일 만큼 한적했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문제 풀이 하고 있는 정국은 교실 저 멀리에서 보던 동그랗고 까만 뒤통수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속눈썹이 ㅇㅇ과 견줄만큼, 어쩌면 ㅇㅇ보다 더 풍성하고 길었으며, 콧날은 날렵했고, 입술은 여자애마냥 붉었다. 머리는 매일 관리를 하는 것 마냥 결이 좋아 보이는 칠흙 같은 흑발. 혹은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백설공주가 부럽지 않겠어. ㅇㅇ은 자신보다 더 예쁜 남자애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자니 질투가 샘솟았다. 수려한 외모에 비상한 머리라니, 인터넷 소설에 나올 법한 모습이네.

 

허, 콧웃음 치며 샤프를 쥔 손을 빙글 돌렸다. 어느 누가 겉모습 만으로도 완벽한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리. 사실 ㅇㅇ은 정국을 좋아하는 여자애가 한 둘이 아니란 점은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건 툭하면 정국에게 사사건건 시비거는 여자애들 무리만 봐도 충분히 어림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때마다 퉁명스럽게 받아들인 정국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도서관 한 편에 위치한 대형 선풍기의 바람이 불자 정국의 체취가 ㅇㅇ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순한 섬유 유연제향. 정국과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향이었다.

 

"듣고있냐?"

"어?"

ㅇㅇ의 마음 속 독백은 정국의 말로 인해 와장창 깨졌다. 듣고 있냐고. 재차 묻는 말에 당연하지, 대답했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자신이 정국의 눈을 피하며 자신감 넘치는 단어로 얼버무리는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진땀을 빼고 있는 ㅇㅇ을 의심스럽게 쳐다본 정국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거 풀어봐 이제."

정국은 ㅇㅇ이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뻔한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괘씸해 슬쩍, 고갯짓으로 문제를 가리켰다. 이걸..? 불안한 목소리를 타고 내려온 말이 흔들리더니 이내 입을 일자로 다물어버렸다. 뒤끝을 흐린 물음표가 툭, 끊겼다.

"사실 안듣고 있었..는데."

정국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마친 ㅇㅇ은 곧바로 미안! 사과했다. 얘는 사과만 하면 단줄 아는 건가. 안그래도 복잡한 문제라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입안이 매말라 있었다. 방금 동안의 시간이 모조리 낭비됬다 치부하니 기분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올라가는 분노 게이지에 짙은 한숨을 내뱉고 와다다 말들을 쏟아냈다.

"너는, 좀 부탁을 했으면 집중을 하던가. 내 공부하기도 급급한 사람이 기껏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면 걸맞는 태도를 좀 보여 제발. 야, 막말로 바쁜 사람 붙잡아두고 뭐하는 짓이야?"

ㅇㅇ은 양심에 콕콕 찔리는 말만 하는 정국이 미워도 다 맞는 말이라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다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른다 해도 정국의 귀에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게 뻔하고, 그럼 정국은 또 불같이 화를 내겠지. 빠른 상황파악으로 얌전히 입을 다무는게 현명하다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시무룩한 마음에 입을 삐죽이다 정국 쪽으로 틀어져 있던 기출 문제 프린트에 손을 뻗었다. 내 주제에 무슨.

"미안.. 이건 내가 알아서 풀을게."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굴듯한 표정을 하고서 제 쪽으로 손을 뻗는 ㅇㅇ에 되려 당황한 정국이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몰아세웠나. 여자는 부드럽게 대하라는 이유가 이거였나보다. 너무 예민하니까, 특히 ㅇㅇㅇ은 더 그런 것 같기도.

책상 위에 올려진 손을 산만하게 두드리다 점점 ㅇㅇ쪽으로 향하는 종이를 다시 자기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바뀐 종이의 경로에 동그랗게 떠진 토끼눈을 바라보다 험험, 헛기침했다. 됐어, 너 어차피 풀지도 못할거잖아. 정국은 놀라서 반쯤 벌린 ㅇㅇ의 입을 다물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한 번만 설명해주는거니까, 이번엔 진짜 잘들어라."

ㅇㅇ의 튼 입술이 거슬렸다. 뜯은건가. 멍하니 쳐다보다 시선을 내려 ㅇㅇ의 셔츠 카라깃 쪽에 위치시켰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프린트 쪽으로, 그러니까 정국쪽으로 다가오는 ㅇㅇ에게 달큰한 향이 났다. 그 향에 취할까봐 정국은 몸을 살짝 뒤로 뺀 체 똑같은 문제를 또 풀이하기 시작했다.

ㅇㅇ은 빼곡한 글씨로 인쇄된 문제가 가독성이 떨어진다 생각하며 정국의 검정색 샤프를 바라보았다. 이건 이거고, 이건 이래서 이거다, 하는 뻔한 레퍼토리의 문제풀이 방식이었지만 정국이었기 때문에 마치 특별한 주문처럼 들렸다. 예쁘게 달아오른 볼이 수줍은 봉숭아를 품은 것 마냥 풋풋한 태를 냈다.

ㅇㅇ이 가까이 다가갈 수록 정국이 가까워지고, 섬유 유연제 향은 그 농도가 짙어졌다. 순한 줄로만 알았던 섬유 유연제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ㅇㅇ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눈의 초점이 풀리지 않게 바짝 힘을 주고 정국이 짚어주는 곳마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ㅇㅇ은 단순히 섬유 유연제여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향이 정국의 체취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정국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밖 햇살은 그 둘을 내려다보며 뜨겁고 환한 빛을 뿌리고, 장미는 그 둘을 놀리듯 온 몸으로 햇빛을 품었다. 다가오는 기말고사 만큼 둘의 거리 역시 가까워지고 있는 참이었다.

"이제 이해 되냐?"

길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 줄곧 문제로만 향해있던 정국이 ㅇㅇ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 귀신같이 맞춘 정답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답지와 프린트를 번갈아 보던 ㅇㅇ은 응, 대답했다. 빨간 모나미 펜을 들어 문제 위에 세모표시를 했다. 세모의 시작점에서 빨간 볼펜똥이 유성마냥 죽 늘어졌다.

"또 있어?"

정국이 힐끔,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적 여유상 아마 오늘치 문제를 학교에서 풀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오늘 문제 풀기는 물건너 갔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왠지 밉지 않았다. 프린트 위에 손을 올려놨다가 손날에 볼펜똥이 붉은 자국을 찍었다. 정국이 볼펜 자국을 반대 손으로 대충 문대는 동안 ㅇㅇ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직 뒷페이지에 남은 별표가 많았지만 사실 반은 충분히 풀 수 있음에도 정국에게 물어볼 생각에 마냥 설레서 생각 없이 건너뛴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정국의 설명을 듣는 건 과연 자신의 정신건강에 해롭기도 하고. 심장박동이 이상하리만치 빨라지기 일쑤여서 혹여 정국이 ㅇㅇ의 심박수를 듣진 않을까 불안해하며 진땀을 빼야 했다. 너무 민폐이기도 하고.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없어. 고마워."

 

그러곤 옅은 볼우물이 보이게 더 크게 미소 짓는 것이었다. 정국의 동공이 일순 확장되었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그리고 정국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오로지 티 없이 맑은 정국의 눈만이 알 수 있던 작은 변화였다. 일렁이는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감았다 떴다. 아니, 작고도 큰 변화였다. 마음이 무언가를 향한 도약, 또는 그 이상의 어떤 것.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 익숙한 경험은 아닐 거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ㅇㅇ이 가지고 있던 줄 몰랐던 작은 볼우물을 방금 막 발견한 것처럼.

선풍기 바람이 돌아갔다. 달큰한 향이, 아득한 섬유 유연제가, 서로의 코를 찔렀다. 이상하게도 복숭아에게서 나는 향은 복숭아향이 아니라 섬유 유연제임을 뒤늦게 알아챈 ㅇㅇ이 까르르, 소리내 웃었다. 갑자기 이유 없이 웃냐며 타박하는 것을 잊을 만큼의 소리. 방울이 딸랑이듯 청아한 소리가 정국의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저도 모르게 입술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주는 아직 짝사랑 중입니다. 정국이는 몰라요!

독자명을 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추후 관련 공지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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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민앓이  1일 전  
 아직모르는구나...

 답글 0
  무한방탄사랑  1일 전  
 어서 여주맘을 알아줘!!

 답글 0
  겕덹  1일 전  
 순수해지는 느낌...!

 답글 0
  오블리☆  1일 전  
 글이이뻐요

 답글 0
  포도농장  1일 전  
 너무 상큼상큼해

 답글 0
  조아여  2일 전  
 과즙 팡팡 터지네.ㅋㅋ

 답글 0
  바카쏘  2일 전  
 진짜 너무너무 과일냄새 폴폴나요♡♡

 답글 0
  뚜별  11일 전  
 복숭아랑어울리는글이다ㅎ

 뚜별님께 댓글 로또 10점이 지급되었습니다.

 답글 0
  구도연  20일 전  
 달달하다

 답글 0
   26일 전  
 아하 아직 짝사랑...

 답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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